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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편지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소장님의 글입니다.

지(知)와 무지(無知)의 크기와 독서의 상관관계(相關關係)
                                                                      -Ernest Han
사람은 어떤 사실이 갖는 의미를 파악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말고 있는 만큼의 논리적 지식과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만큼의 이성적 감정을 한계로 한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느낀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바다는 무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바다에서 인간이 지금까지 알아낸 지식은 너무 적어서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뗏목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때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 아는가 하는 범위, 죽 ‘뗏목‘을 인식의 대상으로 놓고 볼때, 공교롭게도 인식하려는 자의 인식의 크기와 인식하려는 대상의 크기다 서로 상대적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런데 이 상대성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산수적 비율개념과 정 반대로 설정되는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암기보다 이해 위주의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지식’이라는 것이 일반적이 보통의 사건이라면 내가 얼마나 ‘안다’라는 생각과 내가 얼마나 ‘모른다’ 생각을 인지함에 있어서, ‘아는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르는 것’이 적을 것이고 ‘모르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는 부분’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의 뗏목’에 타고 있는 인간에게는 이 당연한 것 같은 법칙이 성립되지 않는다. 무한한 지식의 바다에서 내가 아는 것은 매우 작고 유한한 조각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인식의 문제에서, 한 인간은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뗏목이 지식의 바다와 닿아 있는 부분만큼 자신이 ’모르고 있다‘하고 느끼게 된다. 그 까닭은 위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알 수 없고, 그저 자기가 아는 만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지식‘의 뗏목이 지식의 바다와 맞닿아 있는 만큼만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아는 것이 전혀 없다면 지식의 바다와의 교점이 없으므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가에 대해거도 전혀 의식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의 세계에서는 ‘아는 것이 많은 만큼 모르는 것이 줄어드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모르는 것이 많아지게’된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 암기하지 말고 이해를 하려고 애써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올바른 학문과 지식의 바다에서는 모든 것이 연관되어 단 하나의 ‘지식의 바다’로 존재한다.  따라서 아무것도 모를 때는 전혀 지식에 대한 갈증이 생기지 않지만, 어떤 것을 하나만 알게 되면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알고 싶어지는 부분이 바로 모르는 부분이니, 많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알고 싶어지는 게 많을 것이요, 알고 싶어지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뜻이니 그 사람은 필시 정말 많이 모른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독서를 통한 이해력과 상상력이 공부나 학문의 근간이 되어야

인간은 누구나 매우 큰 ‘지식의 뗏목’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무한한 지식의 바다에서 자기가 아는 것을 건지는 일, 즉 “뗏목을 만드는 일‘은 지식의 편린들의 유기적 관계를 밝혀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사실을 서로 동떨어진 사건으로 보고 무조건 암기를 통해 알려고 하는 자세로는 자장 작은 뗏목조차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점점 크게 확장될 수 있는 뗏목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사건의 유기적 관계를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보이지 않는 논리적 연관성을 파악해 낼 수 있는 생각을 키워야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논리적 연관성을 찾아내는 일은, 충분한 감정적 느낌과 상상력을 통해 키워진 논리력을 가진 후에나 가능하게 된다.
더욱더 진화하고자하는 인간의 욕구는 지식에의 욕구와 맞물려 왔다. 이에 따라 인류는 자신의 역사를 통해 꾸준히 ‘거대한 지식의 뗏목’을 건조하려는 꿈을 키워왔고, 또한 그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한 기록들을 남겨 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책’이며, 그 방법에 바로 독서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어릴 적에 누구나 듣거나 읽었던 이야기책에서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읽히는 거의 모든 동화는 비현실적이다.
동화 속에서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수도 있고 천당과 지옥을 마음대로 다닐 수도 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 어린이들에게 권장되는 이유는 바로 그 이야기들이 가진 흡입력과 상상력 때문이다. 아이들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교감을 통해 기쁨, 슬픔, 분노,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감성을 키우고 동시에 깊은 상상력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이아이가 자라면서 좀 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 책으로 독서으 대상을 넓혀 가게 되면,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저의 크기와 상상력 또한 좀 더 현실적이 되고 보다 정교해진다. 이 과정에서 이성과 논리의 무딘 날이 점점 예리해지는 것이다. 결국 상상력과 감정을 가지는 한 인간이 깊이 있는 이성과 치밀한 논리를 얻게 되면 이것을 바탕으로 어떤 학문적 사실에 대한 이해력과 응용력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공부와 학문의 근저에는 독서를 통해 자란 이해력과 상상력이 뿌리를 틀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학문을 한다는 것은 그저 허울 좋은 자기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를 통해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어야

결국 ‘독서’를 해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독서’와 ‘공부’가 서로 증가함수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온 인류가 아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감소함수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공부하라고 했더니, 책을 일고 있다’라고 야단치는 모습이 이해 될 수 있는 곳은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한 것이다. 전 세계인의 머릿속에는 공부=독서의 등가법칙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의 지식의 뗏목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형이상학적 존재로서의 본래적 인간을 실현하는 일이며, 행복을 찾는 일이며, 모든 현자들의 깊이 있는 말을 깨닫는 단하나의 방법이며,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서 생기는 문제를 최소화하는 논리적 방법이며, 질 높은 삶을 사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은 ‘독서’를 통한 ‘지식의 축척’으로 쌓여서 다음세대로 전달되고,  그렇게 해서 끊이지 않는 진화의 사슬로 작용한다. 이 모든 법칙을 뒤집어서 ‘공부’를 하되 ‘독서’를 하지 않고 ‘생각’을 하되 ‘논리’가 없고, ‘느낌’을 가지되 ‘감동’이 없고, ‘행동’을 하되 ‘이성’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서 의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다고 말하면 이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기가 불가능해진다.
동서고금의 현자들은 “책속에 길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때 ‘책’이란 무엇이며 ‘길’이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하여 올바른 길을 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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