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본질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는 추상적입니다. 아름다운 물건은 본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물건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 존재할 뿐입니다. 물리적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움'을 느끼는 추상적 정신작용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입니다. 이렇듯이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 의이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 세상 물질자체가 의미를 가질 뿐이며 생각과 정신은 그에 종속된 부속작용일 뿐이다.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유물론을 바탕으로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입니다. 그리고, 이를 지독히도 혐오하는 현재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공산주의를 사는 현재의 사람들은 오직 정신적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해 절대적으로 열세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의 빈곤은 '노동자들의 진정한 자유'를 구현하는 정신적인 측면에 의해 '물질주의의 팽배에 의해 미국의 노예가 된' 남한보다 더 나은 선택으로 둔갑해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출발은 '유물론'적 사고입니다. '부르주아'와 '쁘롤레따리아'를 구분짓는 것은 철저히 '물질'입니다. '가난한 양반'의 개념은 없습니다. 가난하면 쁘롤레따리아이며 부자이면 '부르주아'입니다. 이 철저한 '유물론'은 눈에 확연히 보이는 이유 때문에 급속히 세상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본래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지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고한 독재체제의 수장인 김정일은 최고의 권력과 그로 인한 호사를 누려도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라는 추상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스스로 가난하지만 진정한 노동자들의 자유를 부르짖는 높은 정신을 가진 '가난한 선비'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철저한 유물론이 존재하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 철저한 추상적 관념론입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유물론을 비판하고 인간의 정신작용을 근본가치로 삼은 사람들의 모임을 보면 그 이유를 금새 알 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경제제도에서는 철저히 객관주의를 택하고 있지만 그것은 경제제도일 뿐 그것을 근간으로 종교나 철학같은 형이상학이 '물질'보다 체계적으로 하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민족성'이라든지 '종교'라든지 '생각의 다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인정하고, 이것들이 섞여서 모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찾는 즉 합리적 균형이 이루어 지는 물리적 공간이 바로 '시장'이라는 곳이지요.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해온 정신작용의 우수성을 버리고 느닷없이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더 나은 근거를 물리적 측면에서 찾습니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를 '물질적 풍요'에서 발견하지요. 이들에게 '가난한 선비'는 적어도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유물론'의 실패를 미화하기 위한 표현으로 치부될 뿐이므로,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나라들에 대한 비난 의 근거는 "물질적 풍요"만이 그 척도가 되었습니다 .
철저한 유물론은 그 물질의 정신작용에 대한 우위성을 설파하기 위해 '철학등의 추상성'에 의지하고 있고, 민주주의는 그 정신적 가치를 철저히 '유물론'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고, 이상하고, 답답한 일이기는 하지만 종종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주기 대문에 싫지는 않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이런 정도의 명백한 비 논리 조차 발견해 낼 수가 없습니다.
형식과 본질이 이렇게 바뀐 세상에서의 삶은 '생각'이 없는 인간을 양성해 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매우 실력있는 사람으로 둔갑시키게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지 마시고...
오늘도 한 권의 책을 가방에 넣어서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독서로 시작하면서...
ERN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