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서로 관련이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신의 섭리'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을 때 인간은 형이상학을 만들고 종교라는 것을 분리시켜서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설정하는 현명한 방법을 이용하여 논리와 과학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그러다가, 과학과 논리의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져서 그동안 설명할 수 없던 '신의 영역'에 속해있던 부분들을 포함하게 되자,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마찰, 대립 또는 보완의 관계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세상의 발전 (물질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과 사고라는 추상적 측면에서의 논리화)이 진행되면서, 이 둘의 관계는 점 점 복잡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 경계를 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고 싸우는 시대에 살게 되었지요...
이때, 그 경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이므로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개념을 뒤집어 씌울 수 없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객관화 시키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이 둘 간의 경계는 각자 개인의 뇌에 존재하는 논리의 분화가 얼마나 깊게 일어났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문제의 발생도 그렇고 과정도 그렇고 그 결론을 도출하는데 있어서도 오직 각자가 인식하는 인식의 범위에 모든 것이 걸려 있게 된 것이지요. 이 인식의 범위가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 모이면 이제 그 인식의 옳고 그름과 넓고 좁음과는 아무 관계없이 "힘과 권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각 개인의 "인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뇌에 논리적 분화를 일으키는 것에 관해 오히려 강렬한 반발을 보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생각"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식'의 문제는 '물질'의 문제가 아닌 형이상학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직 물질의 문제에서만 가능합니다. 내면의 문제는 '육감'으로나 느껴지는데, 이 육감이라는 것이 그동안 한 개인의 인생의 결과물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오감'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니, 결국 '육감'이라는 것도 '오감'의 경험치에 불과한 것이므로... 결국 사람들은 물질의 문제에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약용선생을 흠모하는 것은 현재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그를 "형이상학적" "관념적"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지금 현재 살아있어서 나의 옆에 앉아 있다면.... 우리는 먼저 정약용의 외모로 그를 평가할 것입니다. 그가 많이 안다는 사실은 '나'를 불편하게 할 것입니다. 특히나 주변의 몇 사람이 그를 존경이라도 한다면, 더욱 불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평생을 어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평생을 유배생활을 했을 리가 없지요. 지금 이 세상에도 황희정승은 있고, 정약용보다 더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긴 외모 때문에 가지고 있는 않은 돈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학식과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핍박 당하고 그리고 질시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실수라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은 황희나 정약용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꼭 독서하시고 사색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부터 까페 메뉴판을 만들 것입니다.
ern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