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토요예술행사는 덕수궁 미술관에서 하게 되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덕수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지요...
성종이 자기 형인 월산대군이 일찍 죽어 이를 안타깝게 여겨서 월산대군의 아내인 박씨에게 지어준 집... 여기에서 연산군이 자랐습니다. 인수대비는 경복궁안에서 연산군이 자라면 자기 엄마인 폐비윤씨의 일을 알게 될까봐 월산대군의 미망인 박씨에게 양육을 맡겼었지요.
임진왜란으로 왕궁이 완전소실되어서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온 후 이곳에 머뭅니다. 이때부터 왕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지요. 당연히 규모가 커졌겠지요. 이렇게 왕이 임시로 머무는 행궁이 되었다가...그 아들인 광해군이 즉위하자 행궁이 아닌 '경운궁'이란 이름으로 정식 왕궁이 됩니다.
광해군이 1615년 재건한 창덕궁으로 옮겨가고는 자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켜 버립니다. 10년이나 절치부심하며 인목대비는 이곳에서 박해를 받지요...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인조는 왕실의 어른인 인목대비를 먼저 찾아 뵙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통을 이은 왕임을 확인 받지요...
인목대비는 자신이 거처하던 석어당 앞뜰에 광해군을 무릅꿇어 안혀놓고 노한 음성으로 36개 죄목을 물은뒤... 보란듯이 옥새를 인조가 되는 능양군에게 전합니다.
인조는 광해군이 일시나마 왕궁으로 사용했던 이곳을 폐쇄하여 왕궁에 편입되었던 땅들을 다시 원주인에게 돌려주면서 다시 규모가 작아집니다.
그리고 고종때까지 세월이 흐르지요...
고종은 아관파천에서 돌아오면서 러시아 공사관과 담하나로 맞붙은 이곳으로 옮겨옵니다. 그래서 다시 왕궁으로 규모가 커집니다.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1897년 '대한제국'을 발표하고 황제로 등극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곳은 '왕궁'이 아닌 '황궁'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황궁이니 그 의미가 매우 남다릅니다. 이때의 규모는 지금의 덕수궁의 3배에 달하는 크기로 지금의 조선호텔이 있는 자리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황궁'이니 그래야지요...
고종은 지금의 조선호텔자리에 환구단을 쌓고 황제로 즉위하는데 나중에 일본이 이를 헐어버리고 호텔을 지어 버린 것이지요...
을사늑약으로 화가 난 고종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일으킵니다. 일본은 이때부터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다가... 결국 그해 7월에 이곳 중명전에서 고종에서 순종으로의 양위식을 거행하게 되지요. 고종과 순종은 모두 참석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때부터 이곳은 퇴위한 황제가 사는 곳으로 전락합니다. 이때 고종선황제가 오래 오래 사시란 뜻으로 '덕수궁'이란 이름으로 바꿉니다.
1904년 이곳에 큰 화재가 있어서 서양식 석조건물을 짓는데 이것이 석조전이며 현재 덕수궁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지요...이곳이 바로 남북한의 분단이 고착화 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던 곳입니다.
일제가 이 곳을 쪼개어서 가운데 태평로를 내고, 땅을 팔아먹고, 건물을 철거하고, 호텔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규모는 줄어들고 건물은 철거되어 지금의 외양을 갖게 되었지만 이 어마어마한 역사의 현장이 가진 의미는 전혀 줄어들지 않지요...
김구선생님이 일본인을 때려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당하기 직전 고종께서 집행정지명령을 내리는데... 그래서 김구선생님이 살아나는데 이것이 바로 전화기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김구선생의 사형집행을 정지시킨 명령을 내린 장소가 바로 함녕전입니다. 이곳에 대청마루에 전화기가 설치되자 고종은 이를 이용해서 급한 명령을 종종 대신들에게 내렸지요...
오늘...
미술탐방에 오시는 분들과 함께... 연산군이 뛰어 놀던 장소와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꿇어 앉히고 꾸짖던 장소와 고종이 신하들을 입시하여 정사를 논하던 곳. 을사늑약이 맺어졌던 곳,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던 곳... 등등을 직접 그 자리에 서서 회상에 젖어보려합니다.
사실 역사적 가치로 보면... 미술관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미술탐방이지만 덕수궁 탐방을 병행합니다...
오셔서 선조들의 삶을 피부로 배우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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