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왔다가 간 많은 성현들이 '진리'라는 개념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리'라는 개념이 실재함을 가슴 속 깊이 느낍니다.
그러니 '진리'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란 것이 적어도 형식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진리'라는 놈이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그것 자체로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책'이란 놈이 있고 '책'이라는 말이나 글이 있을 수 있으니 인간의 언어 자체가 형식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으니 이걸 도대체 말로 자세하게 설명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말이란 것이 그 자체가 본질적인 녀석이 아니고 형식적이니 문제가 될 수 밖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말로 설명할 수 밖에 없으니 '진리'라는 것을 말로는 설명하되... 그 말로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내어 그 상황을 통해 '말'이외의 '본질적'인 부분을 깨닫도록 하려는 방법을 동원합니다.
즉 예를 들어서 예수님 같은 경우 "돌아온 탕자의 비유"같은 예를 듭니다. 끊임없이 말을 하되... 그 말 자체는 형식적인 것이니.. 그 말로 어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말'자체가 아닌 그 말로 예를 들어 나타낸 어떤 사건을 통해서 '진리'로 가까이 갈 기회를 스스로의 가슴에서 만들 수 있도록 배려하지요...
그런데.... 이 분들이 예로 드는 이 '사건'들은 사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가공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순전히 있지도 않은 거짓말이란 거지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진리와 거짓이 서로 완벽하게 상대적인 것으로 믿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권력욕, 승부욕' 때문입니다. 자신은 '옳고' 남은 '옳지 않은' 일이 일어 났을 때 편안해지는 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따라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그 사회에 동화하려는 '친화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그 사회에서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이질화의 정도'를 크게 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이 두 가지 상반된 자신의 성격을 최대한 잘 이용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매우 논리적인일과 매우 비 논리적인 일이 서로 어울려서 한 사람의 내면에서 정당화 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 났을 때 그 일에 관한 진정한 'fact'와 그 일에 관한 자신의 'emotions'를 혼동하거나 일부러 혼동시키기도 합니다.
"진리"만을 외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만을 이야기하는데도 사람들이 이미 이 말을 알아 듣고 있다면 그들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무수한 "거짓"의 산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알고보면 '진리'도 '거짓'도 상대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저 오늘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위해 노력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언제든지 사그러들 수 있는 '진리'는 커녕 하루살이의 목숨보다 더 부초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자 하는 '나'로 인해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상관관계를 절대화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 듣습니다. 형상화 할 수 없는 것을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는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라 '속임수'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은지...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와 거짓의 상관관계를 얼마나 형식적인 잣대로 구분해 놓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 독서하고 공부하고 사색할 용기가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여러분 모두가 독서하고 공부하고 사색하기를..... 절대적이지도 못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매 순간 거짓말만 하면서 사는 ernest가 바래 봅니다.
ern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