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이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수도 없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본질은 보이지 않고 이것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과 관련을 가질 때에만 그 모습으로 보인다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본질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와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성현들은 각자 자신의 시대에서 자신이 살고있는 문화적 특징과 결부된 '현실'로 나타난 모습으로 '본질'을 소개하고 설파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 보았자 그건 '현실'로 나타난 어떤 모습일 뿐 그것 자체가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본질'에 관해 어떤 단어를 만들어서 이름을 붙인 다음 그것의 일반적인 성질에 관해 설명해 보고자 하는 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노자'의 접근방법은 '본질'에 관해 진지한 접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것이었습니다. 이 본질에 대해 '도(Tao: 道)라고 이름을 지어 놓고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본질이란 놈에 대해 '도'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므로 이에 접근하는 사람에 따라 그에 대해 생각하는바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을 붙여서 그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본질적인 의미의 '도'가 되지는 않으며, '도'라는 이름이 역으로 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객관성을 가지고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여서 인간이 생각을 하고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언어로 나타낼 수 밖에 없을지라도 이미 그 언어가 본질을 설명하는 장애물이 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묵언수행'은 이 언어가 가진 장애를 뛰어 넘기 위해 시도되기도 합니다.
결국, 제가 아무리 본질에 대해서 설명을 잘하고 글을 잘 써 보았자, 그건 이미 언어적 한계를 가진 모습일 뿐 아니라, 또한 이미 본질 자체가 아닌 그가 현실세계에서 가지는 수도 없이 많은 모습중에 시간적 공간적 문화적으로 우리들과 공통점이 있는 어떤 설명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질을 설명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언제나 늘 쓸데없는 일입니다. 다만 그런 설명을 듣고 언어적 장애안에서 그 장애를 느끼지 못하고, 본질의 형식적 모습만 느끼며 살고 있다고 해도... 그러다 보면 언젠가,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고 그 형식적 모습을 보지 않아서 道常道, 名常名이 될 수 있는 실력이 되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에 늘 '본질'에 관한 설명을 멈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에 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진정 '안타까움'을 얼마나 갖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아픈데 그에 관해 어떤 안타까움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엄마와 자식관계의 주체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빠가 집을 나간지 3일째, 연락이 없다...면, 안타까움에 차라리 불안하기까지 해야 그 아빠는 정상적인 '아빠'이고 이 아빠를 안타까워하는 자식은 정상적인 '자식'입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전혀 어떤 느낌을 받지 못해도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아빠와 자식관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개념하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이 안타까움의 크기가 바로 호기심의 크기입니다.
아빠가 집을 나가서 3일째 연락이 없다면 그 안타까움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시지? 혹시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닐까? ...."등등의 호기심을 동반합니다. 아무 호기심이 없이 안타까움만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저 '지금 어디서 무얼하시지?'라는 하나의 호기심만 있더라도 그걸 하루 종일 다른 생각 못하고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면 그걸....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호기심이 큰 사람일 수록 안타까움이 큰 법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인간'은 이 안타까움이 만들어 내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인간은 '호기심'이 많은 인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안타까움' 진정 인간 본질은 바로 이것의 크기에 따릅니다.
어렸을 때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엄마'가 불쌍해서 홀로 숨어서 말없이 울고 또 울었던 사람만이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학자가 되며... 이 세상을 이끌어 나갈 진정한 영웅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중간에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어서 인류 역사에 오점을 남긴 인물들 마저도 그들이 그런 큰 오점을 남길 수 있도록 주변이 협조한 것은 이들이 적어도 어렸을 때에는 그런 안타까움을 가졌던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마저도 그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는 크기가 남달랐지요...
아무리 세상이 발전을 해도 사람들은 오히려 형식적이 되어가고 더 나빠진다고 합니다. 세상이 발전을 하는데 왜 그럴까요? 참 이상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안타까움'이 클 수록 더 인간이되고 더 '본질'로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 '안타까움'이 없을 수록 더 '행복하다.'라는 개념에 접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프면 그냥 병원에 가면 되고'
'배고프면 먹으면 되고'
'아빠가 집을 나갔으면 핸드폰으로 전화해 보면 되고...'
이에 반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배고파도 먹을 것이 없으며'
'아빠가 집을 나가도 안타까워 하는 수 밖에 어떤 방법도 없는 것'
어떤 것이 더 행복해 보이십니까?
당연히 전자가 더 행복하다는 정의는 이미 사람들의 가슴속에 동서고금을 통해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발달하게 되어서...결국 이 세상사람 모두가 원하는대로 완전한 행복이 오게 되는날....
이 세상에 어떤 '안타까움'도 없어지는 날...
모든 인간성이 사라지는 인류문명의 종말도 같이 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무서운 사실 앞에서....
'행복'도 추구하면서 '안타까움'도 키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간접경헙'입니다.
나는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러지 못하니 그걸 보면서 '아픈데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자니... 나는 돈이 있는데 주변사람은 '돈'이 없어야 합니다.
주변사람도 행복하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 단 하나 존재합니다.
바로 책을 통해 그 안타까움을 전수받는 일입니다.
비스마트인들만이라도 이 세상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로 오면 불행끝 행복시작"이라는 말로 모두 여러분을 현혹합니다.
나에게로 오면
"영어 잘하게 해 주겠다." - 영어회사
"성적 올려주겠다." - 교습단체
"인생의 모든 짐을 내려 주겠다." - 종교단체
"돈을 벌게 해 주겠다." - 금융단체..
모두가... '안타까움'을 없애주겠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여러분께 강하게 말해 드립니다.
비스마트를 하면 "안타까움"을 더 가지게 됩니다.... 라고..
비스마트에서 영어를 하면 할 수록 영어가 더 헷갈리게 될 것이며
비스마트에서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성적에서 관심이 멀어지게 될 것이며
비스마트를 할 수록 인생의 짐에 관한 무거움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며
비스마트를 할 수록 돈에서 생각이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오직 돈만을 좆는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모두가 나를 '행복'해 하게 해 주겠다는건지... 모르겠지만....
비스마트를 하는 분들에게 저는 행복을 드릴 능력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고민하고 독서하여서 '안타까움'을 크게하여 오히려 지금까지 아무 느낌없이 지내왔던 일에까지 '안타까움'을 느끼게하려고 늘 노력할 뿐입니다.
'행복'은 누가 줄 수 없는 것...
오직 스스로의 본질에 관한 생각의 크기만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인 것...
모든 눈에 보이는 것에 '눈물'을 머금고 느낄 수 있는 '안타까움'을 크게 하여...
고통스럽고, 아플 때마다,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그 고통을 가슴으로 끌어 안고 내 몸의 일부로 만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오늘도 나의 인생을 걸고... 책읽기를 주저하지 말며...
고통속에 힘들어하는 자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안타까움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기를 힘들어하지 말며...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에까지 생각을 하여 안타까움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어서...
진리와 본질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오늘을 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께 이 가슴의 안타까움을 쏟아내며...
ernest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