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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편지

 

깨달음과 독서 그리고 생각하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 또는 객관적인 사실과 관련된 일로 인하여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것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협조하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았다’라는 말은 어떤 사건이 나의 인식 세계를 넓게 해서 ‘의미 있는 삶’이라는 개념 범위 내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방법으로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 라는 말의 단순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결국 나의 인식의 범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즉 ‘인식의 범위’가 클수록 깨달음이 올 확률도 그만큼 커질 것이고, 또한 깨달음의 단서가 되는 일의 크기와 관계없이 나의 인식의 범위가 깨달음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인식하는 자의 인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깨달음의 모든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때 깨달음이란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정확히 해 봅시다.
깨달음이란 이미 나의 인식범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나의 인식 범위를 멀리 벗어나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현재 나의 인식범위에 속해있지 않으나 현재의 인식범위와 어떤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기회를 통해 내가 그 논리적 연관성을 발견했을 때 나의 인식범위로 새롭게 들어오는 부분을 의미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깨달았다’라는 표현을 쓰지요. 간단히 말하면 ‘인식의 확장’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의 확장’이 일어난 후, 즉 깨달음이 있고 난 후의 문제는 어떤 것이 있나요? 바로 ‘인식의 확장’자체에 대한 깨달음의 문제가 남습니다. 즉 ‘인생 자체’에 대한 깨달음의 문제이지요. 우리가 ‘깨달았다’라고 말할 때 상황에 따라서 단순한 ‘인식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고, ‘인식의 확장’자체에 관한 새로운 정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문제를 풀 때 해답이 안 나오다가 그 문제의 구조를 이해해서 해답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은 ‘인식의 확장’의 문제이고, 어떤 사람에 대해 ‘깨달은 자’라고 말할 때는 ‘이미 존재하는 인식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가진 자 라는 의미 즉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문제입니다. ‘깨달음’이란 말의 의미를 이렇게 두 가지로 정리해 놓고, 이런 것들의 문제와 관련된 논리적 흐름을 생각해 봅시다.
먼저, 첫째 의미의 깨달음이란 인식의 범위를 크게 하는 것으로서 마치 풍선을 크게 하기 위해 풍선 속을 공기로 채워 넣는 것과 같습니다. 풍선이 인식의 틀 즉 인생의 본질적 크기를 의미한다면 이를 채우는 공기는 한 인간이 가진 인식의 범위 즉 현실 가능한 삶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지식, 정보 등 인식 전반과 관련된 모든 형이하학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개념을 포함합니다. 소설을 읽다가 기존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슬픔을 느꼈다든지, 수학문제를 풀면서 새로운 생각의 방향을 발견했다든지 하는 모든 것이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넓히는데 이용되기 때문이지요.
책 읽기가 되었든, 학교 공부가 되었든 이 모든 것들이 인식의 범위를 넓히는데 효용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일 확률이 높게 됩니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암기에 치중하지 말고, 본질적인 실력을 키우기 위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최대한으로 인식의 범위를 넓혀 놓아야 두 번째 의미 즉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두 번째의 깨달음이란 인생 자체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마치 공기를 집어 넣어 풍선이 충분히 늘어나면, 이제 공기를 모두 빼 내고 그 빈 공간을 다른 물질 예를 들어 물로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삶이란 풍선 안에 인식의 범위를 크게 하기 위해 집어 넣었던 종교, 철학, 문학, 인문학 등의 여러 모습의 공기를 빼어 내고 그 빈 공간을 ‘나’ 자신이라는 본질적인 것으로 채우는 행위 그것이 바로 두 번째 깨달음이며,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본질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그런데, 첫번째의 깨달음이 크지 않으면 인식의 범위 자체가 크지 않으므로 두 번째의 깨달음이 올 확률은 그만큼 적어집니다. 그래서 책 읽고 공부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객관적 사실로는 어떤 가치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의 인식범위와 그 방향성에 따른 의미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한 ‘물’을 ‘물’이라고 말해도 ‘물’의 본질적 의미는 이미 ‘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인식의 크기와 방향에 의해 정의되어 버립니다. 이때 이 ‘물’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 역시 ‘물’이라고 말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 그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식의 크기와 방향이란 특성을 가지고 자신이 들은 ‘물’이라는 물체를 정의합니다.
이때 ‘물’이라고 말 한 사람과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물’이란 객체에 대한 인식의 크기와 방향이 서로 다르면 다를수록 사회적인 문제가 나타날 뿐이고 그 것이 같으면 같을수록 사회적인 마찰이 적게 나는 것일 뿐 사실 ‘물’ 자체의 본질적인 의미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노자의 도덕경이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즉,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닌 것이 된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여 말하면  이미 그 본래의 것이 아닌 것이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이 바로 이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가(佛家)에서 ‘살불(殺佛)하라,’ 즉 ‘부처를 죽여라’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깨달음을 얻으라’라는 말이 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부처’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천년도 전에 살았던 그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부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를 배우려고 합니다. 물론 인식의 범위를 넓히는 첫번째 의미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인식의 범위가 매우 한정된 어린 아이가 부처의 도를 처음부터 깨닫는다는 일은 전설 속에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노력해서 인식의 범위가 충분히 넓어지면, 이 인식을 채우고 있던  네팔의 룸비니란 곳에서 탄생한 부처 즉, 이 세상 모든 학문적 지식과 정보를 모두 버리고 자신의 삶 자체로 가득 채워서 결국 두 번째의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의미로서의 ‘부처’를 버리고 나 자신 자신이 부처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살불(殺佛)의 의미일 것입니다.

첫번째 깨달음의 의미로서 부처를 죽이고, 나 스스로가 부처가 되면 그건 세상의 어지러움을 이용해서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취하려는 사기꾼이고, 두 번째 깨달음의 의미로 부처를 죽이고 나 스스로가 부처가 되면 진정한 ‘깨달음’이 온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날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이야기 하면, 사람들은 '휴거'라는 객관적 사실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왔다더니 벌써 2000년이나 흘렀는데 왜 안 오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하늘의 시간으로는 2000년이 매우 짧은 시간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은 위에서 설명한 첫 번째 의미로서의 깨달음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건 단순히 지식과 정보에 관련된 일이며 ‘그날이 가까워 졌다’라고 말한 사람이 예수인지 아닌지를 아는 정도의 수준의 일입니다. 예수가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한 위대한 분이라면 이 말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마지막 날이 가까웠다.’라는 말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깨달음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라면 언제나 마지막 날은 가까이 있습니다. 내가 깨닫지 못하고, 내가 구제 받을 영혼이 아닌 채로 죽는다면 이미 '휴거'가 언제 오든 관계없이 버림받은 영혼입니다. 버림받은 영혼이 휴거가 몇 만년 뒤에 일어났다고 해서 다시 구제 받는다는 말이 성경 어느 구석에도 있지 않습니다. 깨달아서 구원 받은 영혼은 휴거가 언제 오든 관계없이 이미 구원 받아 있다는 것이 정당한 성경의 해석일 것입니다.
그러니 본질은 물리적으로 '휴거'가 언제 일어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지금 이 순간 극복해야 할 시급한 일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 현실 그 자체로서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걸 두고 물리적인 '휴거'를 논하면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오히려 2000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 휴거를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 거짓말쟁이로 만들게 됩니다.
오늘 남이 아닌 내가 구제 받기 위해서, 오늘 남이 아닌 내가 깨닫기 위해서, 오늘 남이 아닌 내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인생을 살아 보기 위해서 즉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발걸음을 내 디뎌야 합니다.

그 발걸음은 ‘독서’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을 하는 순간 ‘독서’와 ‘생각’의 본질적 의미는 저의 인식의 범위에 국한된 의미로 쓰여 졌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각자의 인식의 범위에 국한되어 이 말들은 여러분 각자의 마음 속에 의미가 생성될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라는 개념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설정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책을 읽으라’라는 말이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을 익혀라’라는 말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책방에 가서 부동산이나 주식투자에 관한 책을 살 확률이 높아 지겠지요. 이러한 반응에 질리게 되어 어느날 성철스님이 ‘책 읽지 마라.’라고 말하게 되었을 테지요.
인간의 ‘언어’라는 것도 본질을 나타내기 위한 ‘형식’에 불과하므로, 사용된 ‘언어’를 그 본질적 부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세계’를 가진 자에게만 올바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어’자체를 객관적으로 익히는 것이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 사용된 ‘언어’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인식세계를 넓히는 것이 진정한 공부가 되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정한 공부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위대한 선생님들이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 설명하는 의도대로 알아 듣기 힘이 들게 되지요. 결국 ‘깨달은’ 분들이 점점 말을 하지 않게 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성철스님이 ‘책읽지 마라’라는 말은 이 답답한 세태에 대한 한탄입니다.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이 경고를 의미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해서 이 세상이 형식과 물질만 남는 시대가 오면 이 위대한 천재들은 아마 ‘말하지 마라’라는 말로 이 세상에 대한 절망을 선포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깨달음이 깊지 못해, 오늘도 그저 이 세상의 필부로서 살아가는 저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책 읽으세요'.
'생각하세요'.

ern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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