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에 대해 사고하거나 또는 그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 지난 강의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늘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으로 나누어서 접근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분석'의 1단계이지요.
이것만 되어도 최소한의 논리력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이 논리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생각이나 어떤 일에 대한 설명은 별 의미가 없는 시간낭비에 불과한 경우가 거의 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논리력마저도 없는 사람과, 이 기본적인 논리 정도는 가지고 있는 사람과, 매우 높은 수준의 논리전개 능력이 있는 사람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서 나타날까요?
그것은 바로 더 배우려고 하는 열정에서 시작하여 인생 전반의 문제를 아우르는 문제에 이르기 까지 모든 측면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인식의 범위문제가 이것으로부터 결정지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식의 범위가 자연적인 상태의 오감에 의한 인식범위와 같다면 인류의 발달의 수준은 아직 구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즉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아보고 맛 보고 하는 것들로부터 어떤 분석의 대상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이건 진정한 동물의 수준에서의 인식일 것입니다.
이 경험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합하고 분리해서 추상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면, 이것은 이미 최초의 오감의 단계를 넘어 선 것이기 때문에 일단 “추상적”인 인식 즉 ‘주관적’인 단계의 인식이 됩니다.
따라서 가장 최초의 인식단계는 무조건 오감을 통한 1차원적 정보의 종합에 속하는 ‘객관적’인식 이며, 그 다음 단계는 그 종합된 정보가 나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추상적 상황판단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으로서의 논리는 시작되는 것인데 이때 어느 정도의 단계까지 심화해가며 논리를 유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 사람의 정신적 수준과 함께 존재가치의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때 최초 단계의 정보종합의 논리 수준의 사람은 정보 습득 수단이 자신의 물리적인 오감에 한정되기 때문에 이것이 논리를 펼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인간적 측면에서 보면 ‘생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힘든 단계입니다. 동물적 수준의 자연스런 물리적 반응을 ‘생각’이라고 하기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너무 멀지요.
그런데 이 수준의 사람으로 보면, 판단의 수단이 ‘오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간결하고 수월한 ‘판단’ 프로세스를 거쳐서 주변을 인식하고 자신의 행동의 방향을 설정합니다.
물리적 ‘오감’은 그 것을 기반으로 위로 펼쳐나갈 ‘논리’과정의 기초적인 food로서의 역할 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물리적 판단과 추상적 정신과정의 판단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간의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물리적 판단만 존재한다면 원인만 이야기 한 것이 되므로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결과도 추론해 낼 수가 없게 되지요…
그런데, food인 물리적 판단은 하나이고… 이를 근본으로 해서 쌓아 올리는 추상적 정신과정은 그 논리의 이어짐에 따라 수도 없이 깊어지고 넓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오감을 통한 물리적 인식과정만을 기초로 한 원시적 판단은 ‘인격’을 갖춘 인간이라는 수준을 기준으로 볼 때, ‘동물적’ 수준의 ‘논리’의 시작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단계를 벗어나고서야, ‘인간’적 논리를 이야기 하고 인간적 의미를 추구하는 여타 행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추상적 논리전개의 단계는 한 번 경험한 사람은 그 한계가 끝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자신도 몇 단계를 거쳐서 현재의 정신적 사고의 수준에 올라와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아직 최초단계인 물리적 오감의 반응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추상적’인 세계의 존재를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그 수준에서 머물게 됩니다.
추상적 논리전개의 과정 중 어느 한 부분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해 놓을 방도가 없는 것은 그 위치를 찾지 않아서가 아니요, 그러한 논리의 정의역과 치역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걸 찾기 위한 어떤 노력도 이 분들에게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행태로만 보이게 됩니다.
그 노력의 처음은 ‘독서’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물론 평화시에는요…
독서를 통한 ‘오감의 판단’의 food화….. 가 이루어져야 그 다음부터의 논리적 전개에 의한 어떤 개념의 추상화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세상을 알 수가 없으니…. 도대체 이런 노력이 ‘멍청하고 시간이 많은 자의 시간낭비’로 인식될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인생’을 알고 전체적인 ‘인생의 함수영역’에서 자신의 추상적 삶의 그래프를 어떻게 궤적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절대절명의 행위로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 같은 사람의 충고를 오래 전부터 들어온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한다.’라는 당위성은 가지고 있되, 위와 같은 생각의 ‘동학적’ 그리고 ‘정학적’의미를 모르고 있는 관계로 ‘독서’를 통해 일차원적 오감의 인식범위’를 더 확고히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될수록,,,, 아는 것이 없어지지요…
그렇게 되면 될수록…. 아는 것이 없다는 인식 또한 없어집니다.
그리하여 객관적으로는 알지 못하되, 주관적으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상태에 있게 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무식할수록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부의 필요성 또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알면 알수록 무식을 느끼게 되므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부의 필요성은 가없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알고 모르는 문제가 일정한 물리적 크기의 세상에서의 경쟁관계로 설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르는 게 많으면 아는 게 적을 것이고, 아는 게 많으면 모르는 것이 적어질 것이다.’라고 굳게 믿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공부를 그 정도 했으면 되었지 뭘 더 하려고 하느냐?” 와 같은 정상적인 ‘인간’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언어도단을 태연하게 실행하며 삽니다.
오늘도…..
“비 스마트 하면 장사 잘 된대?” 라고 물으면서,, 자기 자신의 현명한 논리연결방법에 감탄하여서, 도대체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
여러분은 오늘 누구인지.. 다시 생각하면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ern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