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학원 선생님입니다. 점심 때쯤 출근하면 하루에 5시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개별 상담에 학부모상담에 아이들 출석관리 성적관리가 끝나고 나면 10시가 다 되어 갑니다. 그러면 다른 선생님들과 하루를 마감하는 생맥주 한 잔이 그리워집니다. 한 잔 하면서 수다를 떨고 집에 들어가면 별일이 없으면 11시 정도이고 이야기가 좀 길어 진다든지 다른 일이 생겼다든지 하면 12시를 넘기기가 일쑤입니다.
집에 오면 잘 준비를 합니다. 샤워를 못하고 잘 때도 있을 정도로 피곤합니다. 저녁시간 이후에도 강의를 했기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 맥주라도 마시지 않은 날에는 배도 고픕니다. 그래서 또 무엇인가 먹고야 맙니다. 그 늦은 시간에 TV 좀 보다가 자면 보통 한, 두시에 잠이 들게 됩니다.
피곤하니까 늦잠을 잡니다. 아침 9시쯤 일어나는데 일어나려고 하면 늘 조금 더 누워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먹느니, 몸매관리도 할 겸 이불 속에서 좀 더 누워있기도 할 겸 그냥 건너 뜁니다. 9시 반이나 10시쯤에는 어차피 일어나야 합니다. 점심 때 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일어나서 세수하고 주섬주섬 옷 챙기고 잠깐 앉아서 TV 좀 보다 보면 어느 틈인지 시간이 급해집니다.
주말에는 그 동안 밀렸던 피곤함에 낮에도 잡니다. 그리고 저녁에 친구들 만나서 같이 술 한 잔 하면 금방 주말이 가 버립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재미없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짜증을 부릴 때가 많습니다.
“Ernest Han”이란 분이 있는데 물어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랍니다. 일찍 일어나서 먼저 운동을 하랍니다. 운동을 하면서 mp3로 외국어 공부를 하고, shadowing을 통한 wise saying같은 것을 외우랍니다. 그러기가 정 피곤하면 Beethoven의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운동하랍니다. 그것도 힘들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으랍니다. 그리고 들어오면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책을 읽으랍니다. 그래서 스스로 호기심이 자꾸 일어나서 어떤 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피곤함을 이길 때까지 자꾸 재미있는 책을 읽으랍니다. 출근하는 동안에도 책을 읽으랍니다. 멍청하게 앉아 있느니 책을 읽는 것이 낮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짜증이 납니다.
그 분은 저를 몰라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학원에서 하루 종일 강의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이 세상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책 읽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건 원래부터 집에 돈도 좀 있고, 하루 종일 강의해도 피곤하지 않는 건강이 있고, 어렸을 때부터 원만한 생활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한 소장이란 분은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어? 혹시 내 이야기를 쓰신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분 많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변은 늘 같습니다.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가 얼마나 바쁜지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당신은 모범답안 같은 소리만 한다.”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책을 읽고 앉아 있나? 책 읽고 있으면 쌀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운동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다.”
이것은 직접적인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한 답변들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들도 같은 답변인데 다만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위의 답변들과 같은 종류인지 모르고 있는 것들일 뿐입니다.
“우리 애새끼는 아무리 공부하라고 해도 공부를 안 해. 즈 엄마를 닮았나 봐.”
“내가 아파트를 사고 났더니 가격이 떨어져요. 쥐박이가 정권을 잡고 나더니 되는 게 없어.”
“나는 운이 없어도 더럽게 없어. 내가 룸싸롱을 개업했더니, 심야영업이 금지 되더라구, 그래서 오락실을 큰 돈 들여서 개업했지, 그랬더니 오락실 파동 때문에 전부 영업취소 되더라구. 그래서 소갈비집을 냈지. 그랬더니 광우병파동이 와서 그냥 망했어. 왜 나는 사업 운이 이렇게 없지?”
제 귀에는 다 똑 같은 소리일 뿐입니다.
내 가슴과 머리에는 단 한 푼의 재산도 쌓지 않되, 오직 ‘돈’만으로 인생의 목표를 삼고 ‘돈’만으로 세상의 잣대를 만들어 오직 ‘돈’만을 좆으며 사는 것은 “인생을 산다”라는 동사로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죽은 사람을 보고 “살아 있다.”라고 말을 하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피곤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나는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빠쁘다” 라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모를 뿐인 것입니다.
“우리 자식은 공부를 안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공부’란 것이 진정한 인격과는 아무 상관 없는 오직 계량화된 학교 점수만을 의미하는 것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파트를 샀더니 가격이 떨어져서 현 정권이 밉다.”라는 사람은 ‘아파트’의 인격적 개념을 전혀 모르는 사람임과 동시에 종로에서 뺨 맞으면 늘 한강에 가서 화풀이 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과 자신의 인생을 살아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 그 두 가지 사람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뿐이지요. 그 원초적인 이유를 여기서 따지자면 너무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들어가니 간단하게 그저 물리적인 이유만 몇 가지를 떠져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