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썼는데 다 날라가서 요점만 씁니다.
올바른 선생이 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 등의 ‘인격’을 이루는 요소들은 ‘깊이 파는 대상’입니다.
명성과 정보 등의 ‘인격’과 관계없는 요소들은 ‘높이 쌓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높은 빌딩을 짓기 위해서는 그 아래를 깊이 파야 되는 것 처럼 원래의 이 세상의 이치는 지식을 파고 사랑 등의 감정을 파고 들어가서 자연히 높이 쌓는 기반이 닦이게 되면 자연히 ‘지성인’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 등으로 명성이 높아 지고.
사람들은 “20세기 진정한 지성인으로 불리우는 이 사람은?”이라는 퀴즈를 이 사람을 답으로 하는 ‘정보’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지도자로 뽑는 것이 원래의 인간 시스템이지요.
여기에서 등장하는 문제는, 자연히 ‘지식’과 ‘올바른 감정’이 있으면 ‘명성’과 ‘정보’라는 객관적 사실이 따라오는 것이지만 ‘지식’과 ‘감정’은 땅 아래로 깊이 파는 것이고, ‘명성’과 ‘정보’는 위로 쌓는 것이므로 땅위의 것들만 보인다는 사실인데...
사람들은 땅위로 올라온 부분만 보는 것이라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에게 대단해 보이고 싶어하는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 ‘기반’이 없이 ‘명성’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러자면 방법은 하나 뿐이 없습니다. 사회 시스템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무엇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파 내려갈 시간을 아끼지요..
그러니 결국 ‘높이’ 쌓을 것이 없지요.. 그런데 쌓은 것 처럼 보이는 시스템을 만들지요..
아는 것 없되.. ‘대학’졸업장 을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으로 하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대학’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대학’을 갔느냐 못 갔느냐라는 사실이 인간을 판단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등장합니다.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이 사실의 서글픔..
이렇게 되면 아이들이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도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란 인격적 개념은 사라지고 형식적이고 객관적인 개념이 남게 됩니다.
“아이들”이란 개념을 이 두 개념에서 같이 봅시다.
본질적이고 인격적 개념에서 아이들은 “완성되지 않은 그릇, 즉 실수 투성이고 단점 투성이 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큰 그릇이 될 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잘못되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아이들은 “실수나 하고 공부도 잘 못하는 존재.. 그래서 이대로는 대학에 갈 수 없는 존재. 그래서 가혹하게 때려서라도 대학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야하는 대상”이 됩니다.
전자의 개념으로 보면
아이들이 실수하고 어떤 것에 대해 모르면, 그건 바로 그 아이가 가진 장점이 됩니다. ‘저렇게 모르니 앞으로 얼마를 더 알게 될까? 매우 흥미로워 집니다.
후자의 개념으로 보면
아이들이 실수하고 어떤 것에 대해 모르면 그건 바로 그 아이가 가진 단점이 됩니다. “저렇게 모르니 앞으로 얼마를 더 알게 될까? 매우 낙담이 됩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같은 말인데 그 속 의미가 정 반대라는 사실이?
저는 우리 아이가 시험점수가 나쁘면 나쁠 수록 귀엽습니다. 왜냐고요? 제가 아이에게 해 줄 것이 많다는 증거지요.. 그건 바로 그 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을 표시할 기회가 더 많다는 의미이며, 그건 바로 이 아이가 ‘나’라는 선생을 통해 ‘진정한 사랑 등의 감정’과 그 함께하는 시간동안 나에게로부터 ‘지식’적인 면에 많은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경쟁과 “뿌리없는 정보”를 “지식”이라고 잘못 배우게 되고. “잘난체”를 “사랑”으로 오해하는 사이.. 저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지식의 깊이를 파 들어갈테니.. 무조건 성공한다는 사실이 이미 존재합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해 잘 해 줍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이 아이들이 실수하고 징징대고 시험문제를 늘 틀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은 올바른 감정과 지식을 무한히 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은 앞으로 성공할 아이들이 아닌 이미 성공한 절대적인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미 그 무엇보다 더 깊은 지식과 사랑을 알게 될 이미 성공한 인격체인 나의 아이들은,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모르고, 실수하고 투정부립니다.
육이오가 언제 일어났지? 라는 질문에 1592년이라고 대답하는 작은 아이를 보면서 그 ‘무지’함의 귀여움을 무지하게 보여줍니다. 그 ‘무지’함의 행복을 한 없이 맛 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자기 자신의 자식에게 어떤 선생이 되고 싶습니까?
아이가 모르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답답하시나요?
그 ‘대답하지 못함’으로 자신의 무한한 미래를 수 놓고 싶어하는 모습이 예쁘지 않나요?
오늘 여러분은 어떤 선생이고 어떤 부모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rn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