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문제는 사실..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키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라는 것 자체의 가치를 기준으로 보면..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나.. 가장 악하거나. 또는 바보거나. 또는 위미없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이나 똑 같이 귀하고.. 아름다울 뿐이지요...
그러나 존재의 방식.. 즉 삶의 방식이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들어 오면.. 많은 다양한 모습과 그에 대한 평가로.. 삶은 존재하게 됩니다...
이때 예술이나 학문 즉 공부는 "존재"자체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일까요?
여기에 대한 답을 성급히 내리지 마십시요.. 그러나 어떻게 답을 내리든 그 답은 맞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미술을 삶의 수단이나 살아가는 방식의 표현으로 그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그러면.. 존재와.. 예술이나 학문과.. 삶의 방식간에 어떤 방정식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살기위해(존재의 문제) 돈을 벌어야 한다(삶의 방식의문제)으로 접근하느냐.. 또는 살기위해(존재의 문제)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삶의 방식의 문제)의 논리로 접근을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전자와 후자가 "존재"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인데 전자는 "돈을 번다"라는 행위를 선택했고.. 후자는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행위를 선택했습니다.
전자와 후자는 "존재"자체의 의미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 즉 존재의 방법은 매우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다르게 선택한 존재의 방법의 차이는... 살아있을 때는 그 각각의 존재 자체의 의미에서 차이를 수반하지 않지만.. 죽고 나면. 그 존재 자체의 의미의 차이를 수반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전자는 존재의 방법에서 "돈"을 택한 이유로 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돈"이라는 물질에 두었으므로 스스로의 존재를 물질적 존재로 보았고. 이에 따라 물질적인 "몸"이 죽음으로서. . 자신의 "존재"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후자는 존재의 방법에서 "깨달음"을 택했고.. "깨달음"이란 물질이 아니고 정신적이고, 추상적이고, 내면적인 문제이고.. 이 정신은 육체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서.. "몸"이 죽었다고 해서. 같이 "죽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두 사람의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같이 공부를 해도 전자는 "취직"이 잘되어서 "돈"을 잘 버는 것을 기준으로 공부를 하지요.. 후자는 자신의 내면적인 실력을 끌어 올려.. 깨달음을 얻기위해 공부합니다... 이때, 전자에게 있어서 "공부"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돈"을 버는 수단 중 가장 쉬운 것의 의미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후자에게는 "깨달음"의 수단으로 공부를 하니 이것이 "학문"이 됩니다.
짧게 말하면.. 전자는 재산을 밖에 쌓은 경우이고 후자는 안에 쌓은 경우이지요.. 전자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돈"을 충분히 벌고도 계속 불안한 증세를 보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많이 벌어도 더 벌려고 노력하는데.. 이게 채워지지 않아서. 늘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이 정신적 공황을 메꾸기 위해.. 끊임없이 남을 만나서.. 정치를 하던... 사업을 하던... 설교를 하던... 아니면.. 술집에서 한담을 하던.. 이래야 삽니다... 이 사람들을 그대로 놓아 두면.. 사회가 불안합니다.. 무엇이나.. 끊임없이 "보이는"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지요.. "스포츠"가 되었던.. "예술"이란 이름을 빌린 진정한 예술은 없는 전시회가 되었던 끊임없이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스포츠 선수 이름 하나 더 아는데 열을 올리고.. 미술가 이름 하나 더 외우는게 큰 벼슬이 되어서.. 또 여기에 집중하여서.. 남들 보다 내가 더 높다는 어떤 확신을 끊임없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경쟁적으로 변해서. 남을 이기기 위해 평생을 살다가... "인생은 공허하다. 허무하다."라는 느낌을 가지고.. 죽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면.. 후자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후자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전자의 사람들 보다 훨씬 더 경쟁적이고. 호전적이며..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무서운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쟁의 대상.. 호전적 성격으로 싸움을 하는 대상.. 어떠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지요..
남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을 줍니다.. 모두 자신과 같은 의미의 "존재"의 가치를 지닌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 인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의미"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것들을 무시할 수 없지요.. 그냥 사랑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해한 "존재"를 의미없게 하려는 끊임없는 시도.. 예를 들면.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싶은 유혹.. "돈"이라는 물질에 현혹되려고 하는 약한 마음... 편하고 쉽게 그래서 결국 의미없게 이 세상을 살아가려는 육신적 유혹.. 등으로 무장해서 자신의 "존지"를 위협하는 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 혹독한 전쟁을 치루면서. 생을 삽니다..
정 반대이지요. 전자는 남을 경쟁과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합리화시키고.. 용서하고..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반해 후자는 자기 자신을 경쟁과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남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합리화시키고.. 용서하고. 조금이라도 더 괴롭게 살려고 노력하지요....
그래서. 결국 전자는 자신의 "육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모든 "존재"가 사라지지만. 후자는 자신의 "육신"의 죽음으로. 마치. 꽃이 죽어 수 많은 씨를 뿌리듯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지요..
이것을 "부활"이라고 하고. 이것을 "거듭남"이라하고. 이것을 "영생"이라고 하며 이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원히 사는 후자의 사람들은 "존재"의 문제를 뛰어넘어. 스스로는 "존재"라는 것 또한 아무 새로울 것이 없는 의미가 되어서.. 전혀 "존재"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반해. 후자의 사람들은 구태여 자기 자신의 존재가 아무 의미없는 일회성 육체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살면서. 오히려 그 생각과 노력은. "영원히" 존재하거나.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다는데 있습니다...
재미있는 세상이지요...
재산을 안에 쌓으십시요..
자기 자신을 "적"으로 놓으십시요..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하십시요..
잘 모르겠으면.. 비 스마트 하십시요...
ernest
<에구.. 무슨 소리인지. 어제는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고 했다가. 오늘은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오히려 "적"으로 보라고 했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니스트는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면.. 비 스마트 k-1부터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