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과 함께 하는 한국 신화-22
피 맛을 본 후 미쳐 날뛰며 살육을 자행하던 불가사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다. 한때 죽은 자들에게 포위되었던 불가사리는 공기의 흐름마저 멈출 듯 한 죽은 자들의 적막 속에서 서서히 눈을 감더니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죽은 자들은 불가사리의 고통을 이해했다. 억울하게 죽은 지아비에 대한 분노, 강자에게 핍박받는 약자의 고통과 설움, 수명장자에 대한 원한, 뜨겁고 차가운 두 개의 태양과 달 그리고 끝없는 외로움과 한. 그런 것들은 죽은 자들 역시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불가사리는 자신을 이해하는 죽은 자들의 품속에서 어떠한 안락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죽은 자들은 또한 부상당한 수많은 후문의 군사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눈을 감겨 주었다. 병사들을 잠재우려는 것이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곁을 지키자 수레멸망악심꽃의 꽃가루들이 모두 사라졌다. 달콤한 꿈을 꾸는 후문의 병사들에게는 어떠한 분노와 악의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죽은 자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적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꽃가루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죽은 자들은 서천 꽃밭에서 가지고 온 영험한 꽃들로 후문의 군사들을 치료하고 살려내기 시작했다.
뼈살이 꽃을 뿌리자 사라진 뼈가 생겨나고 부러진 뼈가 다시 붙기 시작했다.
피살이 꽃을 뿌리자 말라버린 피가 다시 돌고 온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살살이 꽃을 뿌리자 찢어지고 갈라진 피부가 다시 살아나고 붙기 시작했다.
혼살이 꽃을 뿌리자 전쟁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이 활짝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편 수명장자는 자신을 죽이려는 부하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네 이놈들~! 그까지 꽃가루 좀 마셨다고 이정도로 미쳐 버린 것이냐”
수명장자는 달려드는 노호정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정확하게 가격했다. 노호정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지만 다시 으르렁 거리며 수명장자를 노려보았다.
“정신 차리거라 이놈들~!!”
수명장자는 모두를 단 칼에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자신이 아끼던 부하였으며 맹수들이었다. 수명장자는 이들이 빨리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죽이기를 주저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수명장자의 기대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욱 끔찍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문이 부서지면서 몇 명의 미친 자들이 들어왔는데 수명장자는 이들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명장자의 아들, 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의 시신을 마구 때리고 밟더니 나중에는 찢어 버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수명장자를 보더니 미친 듯이 포효하며 뭐라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아악~!!! 내놔~!! 내꺼야!! 아아악~~!!!”
수명장자의 자식들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수명장자에게 악을 썼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데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수명장자는 수레멸망악심꽃의 꽃가루를 마신 자들이 분명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눈에 보이는 자와 싸웠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아까와는 달랐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덤비려고만 할 뿐 자기들끼리는 싸우지 않고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냐? 그것이 무엇이냐?”
수명장자는 번개를 바라보았다. 그는 배가 갈라져 모든 창자가 바닥으로 쏟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입을 벌려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여우귀신인 노호정과 구미호도 짐승이라 말 대신 으르렁 거리고만 있었다.
‘도데체~~~!!’
수명장자는 분노라기보다는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번개, 풍우, 여우귀신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 모두 자신이 아끼던 사람들이며 맹수들이었는데 이들이 왜 자신을 죽이려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의 자리를 원한다”
수명장자는 귀가 번쩍 뜨였다. 똑똑히 들었다. 나의 자리를 원한다고~?! 수명장자는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풍우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풍우는 가슴의 상처 때문에 입에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때문에 말이 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알아듣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의 자리를 원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
풍우는 쿨럭 거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내 너를 심판 할 것이다”
“너를 죽이고 새로운 왕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왕”
충격이었다. 풍우가 자신을 밀어내고 왕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수명장자는 평소 충직했던 풍우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했었다.
“뭐~ 뭐라고~?!”
수명장자는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풍우가 왜 저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명장자는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풍우에게 부와 권력을 원하는 만큼 줬다고 생각했다. 사실 맹천이나 번개 그리고 벼락에게도 많은 재물을 하사했으나 풍우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누구보다 충성스러웠던 풍우였기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풍우에게는 막대한 부를 선물 했었다. 그런 풍우가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한다니 수명장자로써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그는 번개를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몰골로도 수명장자를 잡기 위해 계속 버둥거리고 있었고 입으로도 쉬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도 풍우와 같은 게냐?!”
수명장자는 묻지 않아도 번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의 자식들도 같은 것을 원하는 걸까?
“내놔~ 내꺼야~!!”
“죽일꺼야. 내꺼야.”
수명장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왠지 허망했다.
수많은 세월을 전쟁터에서 보내며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모든 동물들이 자신을 따랐으며 그 힘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자신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인간 세상을 연 것이다. 그는 인간들이 신을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인간들이 신이 아닌 자신을 따르기를 원했다. 그래서 천지대왕과 목숨을 건 한판 대결을 벌이기까지 했고 결국 승리했다.
수명장자. 자신은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
수명장자는 자신이 유일무이한 왕이라고 또한 세상이 자신만을 숭배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인간들이 숭배한 것은 새로운 세상의 왕인 자신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앉아 있는 왕좌만 원하고 숭배할 뿐이었다.
‘도데체 무엇이냐~~!!’
자신이 총애하던 부하들조차 자신을 숭배하지 않았다. 단지 기회가 생기면 자신을 죽이고 왕의 자리만 차지하려던 자들이었다. 저들에겐 나 수명장자는 없고 오로지 수명장자의 왕좌만 눈에 보였던 것이다.
“도데체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수명장자는 절규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셀 수 없이 많은 재물을 빼앗아 자신만의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신세계를 연 것이었고 이러한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인 수명장자였기에 최고의 자리까지 오를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으윽~!!”
수명장자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가슴 속이 아려왔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의 눈에는 미쳐서 발악을 하고 있는 자식들이 들어왔다. 자신이 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었나?! 무엇이 저 아이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인지. 왜 자신을 이토록 미워하는지.
수명장자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후회됐다. 그냥 모든 것이 후회되었고 후회 될 뿐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수명장자는 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죽음을 떠올렸다.
‘그렇게 나를 원한다면 나를 가지거라’
수명장자는 문득 자신이 처음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소가 지어졌다. 순간 뒷목이 따끔해졌다. 노호정이 수명장자의 목을 문 것이다. 곧이어 풍우와 구미호가 자신을 물거나 잡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 글쎄 수명장자는 고통을 느끼진 않았다. 오히려 좀 마음이 놓이면서 편안해 진다고 해야 하나.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찰랑~ 찰랑~ 칠성~ 칠성~
수명장자는 점점 흐릿해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칠성~ 칠성~
수명장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몸이 너무 무겁고 잠이 쏟아졌다. 눈이 점점 감겨진다.
칠성~
“수명 오라버니.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깨운다. 수명장자는 빨리 이대로 잠이 들고 싶었다. 하지만 방울을 흔드는 자가 내버려 두지를 않는다.
“수명 오라버니. 눈을 좀 떠 보세요”
수명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열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조금씩 눈에 상이 잡히자 수명에게 낮이 익은 사람이 떠올랐다.
‘아~ 너~~!’
오랜 기억 속의 인물이었다.
“수명 오라버니,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저 백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