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과 함께 하는 한국 신화-23(마지막편)
선문과 후문 앞에는 소천국과 백주부인이 서 있었다. 소천국은 여전히 하늘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수레멸망악심꽃을 잡아 비단 주머니에 넣었는데 그럼에도 저주를 퍼 붓는 말과 웃음소리는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자 소천국이 주머니를 가슴에 품고 뭐라 중얼거리며 한참을 다독였다. 수레멸망악심꽃은 주머니 속에서 한참을 발악하더니 결국 조용해지면서 잠이 들고 말았다. 소천국은 주머니를 허리춤에 묶으며 선문에게 말했다.
“악심꽃 중에서도 어린놈을 가지고 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
소천국의 말에 백주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 큰 것을 가져 왔으면 아무리 죽은 자라도 못 견뎠을 게야”
백주부인은 선문과 후문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제 수명장자는 끝났다. 그러니 후문은 나와 함께 천지대왕이 계신 천하궁으로 가자. 선문은 어서 죽은 자들을 데리고 저승으로 떠나거라”
그러자 선문이 물었다.
“저 불가사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죽은 자들이 계속 이승에 머물면서 불가사리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문이 난감해 하자 사냥을 좋아하는 소천국이 나섰다.
“불가사리는 이승에 머물면 또 소란을 피울 수 있는 녀석이니 내 직접 천하궁으로 데리고 가면 될 것이야”
하지만 선문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보기에 불가사리는 죽은 자들의 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천하궁으로 가기 보다는 자신이 있을 저승이 더 어울린다는 판단이었다. 선문이 자신의 생각을 전하자 백주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의 말이 옳은 것 같다. 저놈은 힘이 좋으니 데리고 농사라도 짓게 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알려준 백주부인다운 생각이었다.
그러자 후문이 입을 열었다.
“아니 죽은 자들은 먹지도 않는데 무슨 농사를 짓는다는 겁니까?”
소천국도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그냥 천하궁에 데리고 가서 같이 사냥이나 하는 게 더 좋을 듯 한데 말이야”
“제 생각에는 앞으로 언제 다시 수명장자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가사리를 제가 데리고 있다 전쟁에 사용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그러자 백주부인이 혀를 차며 후문을 노려보았다.
“네가 인간세상을 잘 다스리면 어찌하여 수명장자가 다시 나타난단 말이냐”
백주부인의 호통에 후문과 소천국이 움찔했다.
“내가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이참에 짚고 넘어가야 겠다”
후문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먼저 선문이 아니었으면 넌 이 전쟁에서 패했을 게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네가 전쟁에서 모든 군사를 잃고 패배 직전에 있을 때 너의 형 선문이 죽은 자들을 데리고 와서 불가사리를 막았으며, 수레멸망악심꽃을 서천 꽃밭에서 가지고 왔으므로 전황을 단번에 역전 시킬 수 있었다. 이는 처음부터 네가 전쟁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말한다. 소천국 할아버지가 너를 서천꽃밭에 데리고 갔을 때 넌 무엇을 한 것이냐?! 거기가서 꽃 구경만 하다 온 것이냐?!”
후문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얻은 칼과 칠성방울은 적은 숫자로 수명장자에게 대항하러 가는 너의 군사들에게 사기를 불어 넣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너는 그것을 잘못 사용해서 오히려 수명장자의 맹수들을 더 사납게 만들었다. 그 덕에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잘 알 것이다. 수많은 너의 군사들이 짐승들의 밥이 되었다.”
후문은 무릎을 꿇었다.
“셋째로, 전쟁 초반부터 너는 수명장자에게 연이어 패했다.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나마 귀네기또 삼촌과 그의 부장들이 슬기롭게 대처 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너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넌 너의 능력을 단 한번도 보여주질 못했다. 그런 네가 이승의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준비도 부족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활용할 줄도 모르고 능력도 안 되는 네가 과연 왕좌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냔 말이다~!!!”
백주부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수명장자의 군사들에게 죽은 수많은 너의 병사들이 있다. 칼에 맞아 죽고, 화살에 맞아 죽고, 돌에 찧겨 죽고, 발에 밟혀 죽고, 불에 타서 죽은 자들. 또한 수명장자의 맹수들에게 죽은 자들은 어떻더냐~ 발톱에 온몸이 찢어지고 이빨에 물리었으며 목덜미가 뜯겨서 피를 뿜었으며, 팔다리가 부러지고 심지어 눈알이 빠져 죽은 자들이 있다. 너를 위해 싸운 자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겪게 했으니 너의 죄가 얼마나 큰지 너는 알고 있는 게냐~!!! ”
후문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누구도 수명장자와 전쟁을 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냥 후문 스스로가 전쟁을 선택한 것이었다.
백주할머니와 소천국 할아버지에게서 수명장자를 멸하라는 지시를 듣는 순간부터 자신은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칼과 방울을 주신 것 또한 작게는 자신의 병사들을, 크게는 모든 인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넣어 주라는 의미였지 힘을 내서 싸우라는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하~~~’
왜 자신이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 수명장자를 멸하는 법은 수없이 많았는데 왜 처음부터 전쟁 이외에는 아무 생각을 안 했던 것인지. 오로지 전쟁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서천꽃밭에 갔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온 것이 아닌가. 후문이 스스로가 너무 답답하고 한심그러웠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후문의 어깨를 소천국이 두드리며 일으켜 세웠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넌 앞으로 훌륭한 이승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것도 천지대왕의 뜻일 게야.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는 말거라. 후문아~”
그러면서 소천국은 선문에게 말했다.
“애초에 네가 꽃을 바꿔치기 하면서 일이 좀 틀어졌다. 허나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허허허”
백주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후문에게는 아직도 할 말이 많으나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방금 말씀대로 선문이가 꽃을 바꿔치기 하면서 천지대왕이 원하시는 세상의 조화가 조금이지만 틀어진 것 같다. 그래도 이승의 왕은 후문이고 저승의 왕은 선문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으니 이승의 후문은 저승 일에 반드시 관여해야 하며 저승의 선문도 이승 일에 절대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절대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알겠느냐~!”
선문과 후문은 백주부인과 소천국 앞에서 천지대왕의 뜻인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저승의 왕이 된 선문은 백주부인에게 간청했다.
“제 생각으로 죽은 자들을 영원히 저승에 두는 것은 조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을 깨우치게 만들어야 세상이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백주부인과 소천국은 선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인간이 이승에서 질서 있게 살 수는 없습니다. 잘못을 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 잘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단 한 번의 삶으로 천지대왕의 뜻을 깨달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승에서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승에서 다시한번 기회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승과 저승의 질서가 잡혀 세상이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문의 말이 옳다”
소천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문이 계속 말을 이었다.
“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제가 저승을 조화롭게 다스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백주 할머니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수명장자의 눈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손을 잡고 동물들과 뛰어 다니던 소녀였다. 누구보다 동물들과 놀기를 좋아하던 꼬마소녀. 수명장자는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그때의 꼬마가 다시 돌아왔다. 어린 나이에 시집간다며 울면서 떠난 그 아이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수명 오라버니, 저 백주에요”
백주부인은 수명장자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피를 많이 흘린 수명은 백주부인의 손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잊지 않았다.
“오라버니 저와 함께 떠나시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수명장자가 쿨럭 피를 토하며 말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 누가 나를 반기겠느냐 백주야.”
백주부인은 수명장자의 손을 꼭 쥐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 손자 선문이 오라버니에게 부탁이 있다고 합니다”
백주부인의 말에 선문이 수명장자에게 다가갔다.
“수명장자. 저는 저승의 왕 선문입니다. 저승세계에서 당신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수명장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힘 빠지고 망가진 나 같은 노인네가 저승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느냐. 그냥 이대로 죽을 수만 있어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수명장자의 말에 선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수명장자. 당신은 이승에서 가장 많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저승에서 당신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다시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게 하려면 그래서 인간들이 질서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려면 당신만한 적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이 인간들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자 수명장자가 큰 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이승에서 지은 죄는 어떻게 해야 씻을 수 있는 건가?”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이승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시면 됩니다. 당신의 몸마저 인간들을 깨우칠 수 있도록 바치고 가면 됩니다”
선문의 말에 수명장자는 눈을 감으며 한참을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을 꺼냈다.
“데려 가시게~!!”
수명장자가 말을 마치자 그의 몸에서 연기가 나왔다. 방안을 가득 메울 만큼 연기가 나오더니 곧장 하늘을 향해 올랐다. 수명장자의 몸에서 나온 연기들은 훗날 벌레가 되어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선문은 죽은 수명장자와 함께 저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명장자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 해서 저승을 지키도록 했으니 그가 바로 염라대왕이다. 염라대왕은 훗날 10명의 저승시왕과 함께 저승세계를 지키며 저승과 이승에 질서와 조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한다.
한편 후문은 어머니인 총명과 함께 이승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후문은 총명의 조언으로 이승세계에서 질서와 조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집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집을 지키는 10명의 수호가신을 만든다.
이로써 후문과 10명의 수호가신이 이승을 지키고 선문과 10명의 저승시왕이 저승을 다스리면 세상에 질서를 유지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태양을 떨어뜨린 선문은 훗날 대별왕이 되었으며 달을 떨어뜨린 후문은 소별왕으로 불리었는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러한 신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유지되는 것이니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조화롭고 질서있는 삶을 살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천지대왕이 만든 아름다운 세상을 정성껏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신화, 한국신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케빈과 함께 하는 한국 신화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