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과 함께 하는 한국 신화-16
수명장자의 군사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후문 진영으로 진격했다.
벼락, 번개, 풍우는 모두 후문 군대의 정면을 향해 나아가다 벼락은 군사를 돌려 후문진영의 오른쪽을 쳤고, 번개장군은 역시 군대를 몰아 왼쪽을 치고 들어갔다.
후문군대는 당황했는지 저항은커녕 각자 제 살길 찾아 도망가기 바빴는데 실상 탈출에 성공한 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저 무기도 손에 들지도 않은 체 항복하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후문과 장수들은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뚫기 위해 사력을 다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후미에서 돌진해 오는 비룡과 비천 형제의 부대에게 막히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병들이 남아 있었기에 적들의 접근이 그나마 봉쇄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얼마가지 못할 것이 뻔했다. 수명장자의 군사들은 멈추지 않고 동서남북 사방에서 후문의 부대를 조여오고 있었으며 이제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뒤늦게 후문군대에 합류한 당칠금과 매화부인는 방패부대를 활용해 적의 화살을 필사적으로 막았고, 삼태성 형제들은 후문의 안전한 탈출로를 만들기 위해 적진을 정신없이 누비고 있었다. 귀네기또는 자신의 군사들로 하여금 방어진을 친 다음 방패와 장창으로 철벽처럼 버티고 있었는데 이것이 적의 진격을 막는데 효과를 보이자 당칠금과 매화부인의 방패부대도 바로 합류하여 단단한 방어막을 형성하였다.
벼락, 풍우, 번개 등의 수명장자 측의 장수들은 쉽게 무너지리라 생각했던 후문의 군대가 갑자기 방어막으로 대항해 오니 적잖이 당황했다. 그들은 군사들을 독려하며 적의 방어막을 뚫어보려 했지만 후문의 방어막이 물러서지를 않았다. 수명장자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다가 미소를 흘렸다.
‘오호~ 막는다 이건가~’
그는 적이 최후의 힘을 짜내어 버티고 있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저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장수들에게 명령해 힘으로 밀어부치도록 했다.
볏짚으로 덮인 수레를 준비하여 적의 방어막을 화공으로 무너뜨리려던 벼락과 풍우는 반대를 했다. 힘으로 미는 것은 필요 없는 아군의 피해가 생긴다는 것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번개 역시 반대를 했다. 그는 기병으로 적의 방어진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서 아니면 맹수부대를 지금쯤 활용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수명장자도 이들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은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막강한 힘을 보여 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맹수부대를 활용하는 것도 좋았지만 조금 더 상황을 지켜 본 다음에 결정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그의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후문군대와 수명장자의 군대는 서로가 밀고 미는 힘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양측이 서로의 방패를 벽으로 삼고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었다. 수명장자는 계란보다 얇은 방어벽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옆에서 번개는 군사들을 모아 한쪽벽만 무너뜨리면 적의 방어진이 연달아 무너진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작전을 변경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수명장자는 그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누가 보아도 곧 끝날 것이고 단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의 문제였다.
시간이 흐를 수록 후문군대 방어진의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후방에서 장상과 동수자의 부대가 비룡 비천형제의 부대를 잘 밀어내고는 있었지만 위에서 몰려드는 적의 수가 워낙 많아 지금처럼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후문은 말 위에서 사력을 다해 방어막을 막고 있는 자신의 군사들을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수명장자도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군대는 이미 원래 진영이 있던 곳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만큼 앞에서 밀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다행히 후방에서 선전을 하고 있었기에 앞에서 밀렸으나 뒤로 물러 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후문은 긴장으로 인해 손에서 땀이 멈추지 않았다. 하늘에서 소천국 할아버지와 백주 할머니도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생겼다. 잠시 기도를 한 후문은 자신의 군사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라’
앞에서 군사들을 독려하던 벼락은 수명장자에게 비룡과 비천을 지원해야 한다고 보고 했다. 비룡과 비천의 후방부대가 약해 뒤에서 계속 밀리고 있으니 적을 섬멸하는데 더욱 시간이 든다는 것이었다. 수명장자도 그 의견에 동의해 군사를 보내도록 했다.
그때 풍우가 깜짝 놀라면서 수명장자에게 급하게 달려왔다.
“군사를 당장 물리셔야 합니다. 적의 함정입니다”
그러자 수명장자가 의아한 얼굴로 풍우를 쳐다봤다.
“처음부터 적의 수가 너무 적어 의심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풍우는 매우 긴장하여 눈썹을 떨고 있었다. 수명장자는 풍우가 이렇게 떨어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적들은 양쪽 산 밑까지 물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산들을 보십시오. 나무가 모두 베어졌습니다”
풍우의 말을 들은 수명장자는 눈을 돌려 양쪽 산을 바라보았다. 저곳은 비룡과 비천이 매복을 하던 곳이었다. 후문의 군대는 매복한 비룡 비천 부대를 찾아내기 위해 몇일전부터 저 산의 나무들을 전부 베어버렸었다.
“그거야 저들이 매복 때문에 한 거 아닌가~”
그러자 풍우가 눈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저 산 바로 뒤가 무엇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후문은 말안장위에서 칼을 높이 들었다. 칼을 햇살을 받아 반짝 반짝 빛이 났고 웅~ 웅~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깃발이 펄럭이며 신호를 보냈고 산 정상에서 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명장자도 퇴각 신호를 보냈으나 불행히 그의 군사들은 그 신호를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방패를 사이에 두고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
수명장자가 아차하는 사이 후문의 군사들이 갑자기 방패진을 거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수명장자의 선봉이 일시적으로 무너지며 전열이 흩어졌는데 그로 인해 어느 누구도 산 꼭대기를 바라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덕춘공주께서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오시니 군사들이 더욱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해원맥 장군이 더 힘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저만 그렇습니까?!”
덕춘공주 옆에서 내일낭자가 해원맥을 놀리듯이 말했다. 해원맥은 얼굴이 곧 벌게지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덕춘은 내일낭자를 보며 “너도 농담을 하는 때가 있구나”하며 즐거워했다.
해원맥은 매복한 적을 찾는 다는 구실로 몇일전부터 산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비룡 비천부대를 찾는 척하면서 군사들에게 거대한 바위를 준비시켰고 또한 수레에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을 실어오도록 했다. 덕춘공주의 군사들 역시 수레에 불붙일 나무와 풀들을 모아서 대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자 숨어서 산 아래를 주시하던 해원맥은 적의 돌진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아군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다가 후문으로부터 신호가 오자 분풀이 하듯 일제히 돌들을 굴리게 했으며 덕춘공주는 궁병에게 도망가는 군사들에게 활을 쏘도록 명을 내렸다. 한편 맞은편 산 정상에는 왕장군과 황우생부부가 있었는데 이들도 같은 목적으로 올라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호를 본 왕장군은 직접 바위를 들어 적에서 던지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바위가 날라오자 수명장자의 군사들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바위들이 엄청난 굉음과 파편을 일으키며 굴러오자 부대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도망가는 자들도 덕춘공주 부대와 황우생부부의 부대가 쏟아내는 화살을 피하기 어려웠다. 한때 후문의 군대를 강하게 압박하며 수명장자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던 그런 부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엉망진창이 된 수명장자의 부대였다.
상황이 급하게 변하면서 위기에 처하자 벼락, 풍우, 번개 등의 수명장자의 장수들은 일제히 말을 몰아 군사들의 퇴로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바위와 화살을 피해 성으로 피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으나 가만히 앉아서 군사들이 힘없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동시에 고위급 장수들이 직접 부하들을 구하는 것은 군사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 모습을 보던 후문은 수명장자의 강함이 단순히 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후문의 진영에서 성으로 바위를 피해 도망가던 수명장자의 군사들이 엄청난 흙먼지와 굉음을 일으키며 갑자기 땅으로 푹 꺼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명장자는 깜작 놀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상을 덮어버린 듯한 흙먼지 속에서 군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수명장자는 피가 꺼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수명장자는 두 눈을 부릎뜨고 흙먼지 속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실체가 드러나자 수명장자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드넓은 평원을 바둑판 모양으로 파 놓은 땅굴이었다. 후문의 진영에서 자신의 성까지 수많은 땅굴들이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 빠진 수명장자의 군사들은 미리 매복하고 있던 후문의 군사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땅굴에 빠진 자들은 목책 속에 갇혀버렸고 그 안에는 수많은 날까로운 죽창이 깔려있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군사들의 비명소리에 수명장자는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수명장자가 분노하는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땅굴에 빠진 자신의 군사들을 눈 엎에서 도륙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강림이있다.
수명장자는 이를 갈으며 강림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안 좋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강림과 그의 부하들이 수명장자 군사들의 숨통을 끊어 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벽 바로 밑까지 땅굴을 파서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저들의 작전이 성공한다면 성벽은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옹성과 성벽에서 수명장자의 부하들이 강림의 부하들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끓는 물을 부어도 흙속에 바로 스며들어 버렸고 화살이나 돌덩이도 흙에 박혀 버리거나 좁은 땅굴 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적을 도와주는 꼴이 되었다. 결국 어떠한 방법도 적의 진격을 막지 못한 것이다.
성벽 밑에서 타고 있는 강렬한 불덩어리는 격렬하게 타면서 성벽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켰다. 겁을 먹은 수명장자의 군사들이 하나 둘씩 도망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결국 한쪽 성벽이 기어이 무너져 버렸다.
수명장자는 자신이 믿었던 올빼미와 매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어찌된 것이냐의 질책성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올빼지와 매 역시 영문을 몰랐다. 자신들은 들은 것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었다. 어찌하랴~ 후문과 장수들이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면서 진심은 서로 글을 써서 전했으니 이런 사실을 모르는 올빼미와 매가 속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땅굴 역시 천막을 치고 숙소처럼 꾸민 다음 파기 시작한 것이다. 올빼미와 매만 탓할 것은 아니었다.
이제 성벽 아래에서는 엄청난 열기와 함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두곳이 아니라 셀수 없이 많은 곳에서 일어나니 불을 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명장자는 이제 최후의 수단을 쓸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아니 이미 늦었지만 이제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마침내 성벽이 완전히 무너지고 적이 앞에서 그리고 위에서 돌진해 내려왔다.
벼락, 번개, 풍우등은 수명장자에게 탈출할 길을 마련했다고 전하려 했으나 수명장자에게 탈출이란 죽음과 다름없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가공할 맹수부대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