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트 가족 여러분!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계시죠? 사실 연말이라고 특별할것은 없죠. 매일이 소중한 일상이니까요.
오늘은 모두들 놀러가시거나 모임에 가시면서 게시판이 심심할지도 몰라 제가 몇년전 쓴 기행문을 올려놓고 나가려고 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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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1, 15, 토, 맑음
부여와 공주
나는 경주에 이어 백제유적지도 처음이다. 내가 중고생이었을 시절은 수학여행이 금지되었던 때라 수학여행다운 여행을 해보지 못한 탓이다. 부여라고 할 때 나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이 떠올랐다. 그게 왜 유명한건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는지 궁금했었다.
처음 우리가 향한 곳은 부여박물관이다. 이 곳에서는 이상하게 너무 피곤하여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말로만 듣던 옹관묘를 눈으로 확인하고 삼국을 통털어 가장 손재주가 좋았던 백제인들의 금관을 비롯한 장식품들을 눈여겨 보았던 것들이다. 옹관묘는 아이들의 것, 성인의 것등이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으므로 묘사할 만한 것이 없다. 박물관에서 엽서와 비싼 서적을 구입했다. 지난번 경주에서 박물관이 보수중이라 들르지 못하고 온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 곳에 경주 박물관책자도 있길래 함께 구입했다. 나와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카페인 기운으로 피곤을 물리칠 요량으로...
그 다음 향한곳은 낙화암이다. 커피탓인지 기운이 좀 난다. 부소산성, 낙화암을 향하는 길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시간은 남짓 걸리는 먼 길이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三忠寺가 눈에 띈다.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린 사당이다. 김유신은 성충이 있으면 백제를 삼킬수 없었으므로 성충을 간신으로 몰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만든다. 백제가 멸망한건 660년. 그 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싸아하다. 역사적 장소에서 그들이 어떻게 싸우고 문화를 꽃피웠는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삼충사를 나와 부소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옆으로 대나무가 꽤 많이 있었다. 남편은 그게 성충의 기개라고 한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오르막을 계속 오르는데 내 손을 잡은 민주가 이상하게 조용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분명히 걷고는 있는데 눈은 감겨 있었다. “민주 자니?” 하고 물으니 “업어줘” 하고 말한다. 이 애는 늘 중요한 순간에 잠을 자고 차를 타면 정신이 반짝드는 얄미운 아이다. 여기서부터 업고 가면 일은 끝난 것. 우리는 어떻게 하나 난감해 했다. 50m 쯤 업고가니 기념품 가게가 나오는데 우리를 본 주인 아주머니가 애가 오래 잘 것 같으면 자기 가게방에 뉘고 가란다. 우리는 고마워하며 민주를 뉘고 나의 핸드폰을 준 뒤 가게를 나와 거의 뛸 듯이 낙화암을 향했다. 부소산성에 보존되어 있는 백제인들의 삶의 터전을 보니 내가 600년대로 돌아간 듯하다. 이걸 발굴할 당시의 사람들이 붓으로 쓸어가며 정성을 다해 발굴했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고맙기도 하다. 부소산성을 나와 낙화암으로 향했다. 3000궁녀란 많이 과장된 말이겠지. 그 당시 이 곳에 3000명의 궁녀가 거주했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낙화암은 더더구나 그 많은 궁녀가 빠져 죽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아직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은 아름다웠다. 절벽이 깍아지른 듯하므로 궁녀들이 빠질 때 절벽에 부딪히며 처참하게 떨어졌을 것 같다. 치마를 뒤집어 쓰고 뛰어내려 꽃이 떨어지는 것 같대서 붙여진 낙화암. 그 비극의 장소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낙화암을 내려오면서 고란사에 들렀다. 고란사의 약수가 유명하다나? 우리는 약수를 한 바가지 마신후 내려오기 시작했다. 고란사의 향냄새를 맡으며 나는 남편에게 기독교는 피의 역사지만 불교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차돈의 순교를 빼고는 그다지 피비린내나는 역사가 없으며 호국불교로서 지대한 역할을 했고 그 심오한 교리가 기독교와는 또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여행은 길을 걸으며 무엇에 쫓기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이롭다. 더군다나 남편은 너무나 박식하여 그의 말로 語錄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가? 아이들과의 이러한 여행은 어떤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감성으로 자리잡아 인격을 만들것이다. 서둘러 민주가 누워있는 가게에 오니 다행히 아직 깨지 않고 자고 있다. 우리는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며 책을 비롯하여 2만원이 넘게 기념품을 구입해 주었다. 아주머니는 커피병에 담은 탄화미를 보여준다. 책에서만 읽었던 까맣게 탄 쌀. 아직도 땅을 파면 나온다고 한다. 그게 타지 않았다면 다 썩었을 텐데 새까맣게 타서 변질되지 않은 천년이 넘은 역사적 쌀을 보니 말로 표현못 할 이상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낙화암 가는 길에 아쉬웠던 점은 泗沘樓(사비루)를 사자루로 표기해놓은 점이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監修라는 걸 모를까?
민주를 깨워 내려오니 2시 50분. 서서히 배가 고팠다. 우리는 중국음식을 먹을까 피자를 먹을까 하다가 피자를 먹기로 했다. 피자 크러스트를 큰 것으로 한판, 스파게티 2개를 시켜 실컷 먹었다. 피자오레의 주인 아주머니는 우리가 다복해 보인다고 한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피자를 먹고 나와 간 곳은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그 곳은 말 그대로 절은 없고 빈 터에 덩그마니 서 있는 5층짜리 석탑이었다. 이 곳이 왜 유명하냐고 물으니 남편의 대답은 이렇다. 목탑은 재질상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어 세심한 표현을 할 수 있는 반면, 석탑은 재질의 특성상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이곳의 석탑은 석탑이면서도 목탑 못지않게 마치 떡주무르듯 빚은 솜씨의 극치를 보여줘 백제인들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기술이 신라의 아름다운 다보탑과 석가탑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겨레에게 신라 불국사는 경덕왕 10년, 서기 751년이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석탑을 등지고 나오니 네모난 연못에서 헤엄치는 수많은 잉어들을 보며 민주가 눈을 떼지 못한다. 궁금했던 부여정림사지 5층석탑을 눈으로 확인한 후 우리는 공주로 차를 돌렸다.
공주박물관은 5시에 문을 닫아 들어가지 못하고 무녕왕릉으로 향했다. 이 왕릉은 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보존하게 되었다 한다. 일본의 도굴왕 가베루가 몇십년을 샅샅이 뒤져가며 이 왕릉을 찾으려 눈을 밝히고 10미터 뒤의 텅빈 가짜 묘까지는 발견했는데 진짜는 해방이 된후 이렇게 발견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무녕왕릉까지 가베루에 의해 도굴되었다면을 생각하면 끔찍하기 이를데없다.
신라의 고분은 토총이라 부장품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반면 백제는 석총과 전축분이므로 도굴이 손쉬워 상대적으로 유물이 적다. 입구만 발견하면 도둑질이야 그냥되는 것이니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연도가 확실히 나 있는 점에서 경주에서 본 무덤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나는 옛날에 전축분이 무언지 몰랐었다. 전축을 틀어서 전축분도 아닐테고 말이다. 벽돌전이라는 걸 그 때 알았더라면... 벽돌로 쌓았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으니 백제인들의 건축솜씨를 알 수 있었다. 전축분엔 벽화가 없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시관에서 본 전축분모형은 웅장한 모습의 용이 그려져 있다. 백제의 왕릉은 산인지 무덤인지 구별을 할 수가 없는 신라의 고분과는 다르게 규모가 작은 편이다. 석총은 사람이 죽은 후 바로 만들므로 가묘가 있고, 특성상, 한 사람을 매장하고 왕비가 죽으면 연도를 통하여 그도 같이 쉽게 매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 땅신에게 땅을 사 매장을 했다는 매지권을 보니 웃음이 나기도 하고 자연을 숭배한 그들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자연을 우습게 여겨 마치 인간이 그 파괴권을 가지고 있는 양 마구 파괴한 결과 인류가 이러한 수난을 당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하늘 신, 땅신을 두려워하고 섬겼던 그들의 자연숭배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 차고 땅이 질어 빨리 가고 싶은데 욕심이 많은 겨레는 뒤로 돌아도 가보고 들어도 가보고 서두르지를 않는다. 바람이 차다고 말하니 민주가 “바람아! 안녕!” 하고 인사를 한다.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 하는 민주의 현명함은 인간의 初心일 것이다. 인간 본연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의 살 길일것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하룻밤 더 자고 가자는 겨레의 떼로 조금 티격태격했지만 내내 즐거웠다. 우리의 두 번째 테마여행, 즐거웠고 이로웠다. 남편의 제안으로 다음엔 수원성이다. 아주 가깝지만 왜 유네스코 지정 유산이 될 만한지 공부하고 돌아보기로 했다. 책장에 잠자고 있는 목민심서를 꺼내야겠다. 이미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가물거리나 수원성의 축조에 대해 잘 씌여 있었던 기억이 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