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6(일)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교육과 교육개혁은 현실인가? 망령인가?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유럽중심의 서구문명이 무너진 고대의 폐허에서 근대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르네상스를 통해 완성되고 있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이 동시에 발호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근대화 과정은 평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몽골의 침략을 간신히 이겨낸 직후 맞닥트린 오스만제국의 확장은 결국 1453년 2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로마를 지구상에서 지워버렸다. 그 이후의 오스만의 발걸음은 유럽본토를 지배권 내에 둔다는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진 뒤 아이러니하게도 전자의 멸망은 고대의 종언과 중세의 시작을, 후자의 몰락은 중세에게 고별을 고하고 근대를 맞이하는 세계사의 시점을 정했다. 기후의 도전에 항상 직면해야 하는 동북아시아의 훈(Hun)족에게 가해진 4 세기의 냉해(冷害)는 그들을 유목민의 본성에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의 푸른 초원을 향해 이동하게 만들었다.
유럽대륙을 지형적으로 나누는 가장 큰 경계는 북해로 흘러들어가는 라인강(Rhine)과 남동방향으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의 경계를 이루며 흑해에서 바다를 만나는 다뉴브(Danube)강이 있다. 로마는 라인강 건너의 동쪽 땅을 게르마니아(Germania)라고 불렀다. 훈족이 이들의 땅에 도착했을 때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얼음으로 꽁꽁 언 라인강을 건너 지중해 지방에 정착했다. 이들을 이끄는 오도아케르(Odo Acer)가 서로마를 무너트릴 즈음에는 지중해의 서쪽은 동고트족(Ostrogoth)이, 남쪽은 반달족(Vandals) 등 게르만 내의 부족들이 이미 자신들의 왕국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자연재해가 훈족을, 훈족은 게르만족을, 게르만은 라틴족을 압박하여 먹이사슬의 관게가 생겼다. 이 때 서로마인들은 바다 가운데 섬으로 구성된 베네치아에서 자신들의 안식처를 찾았다. 이들은 오스만투르크의 이슬람 동방세력과 카톨릭 서방세계를 잊는 중심지역으로 이들 사이의 중계를 통해 부를 쌓아갔다.
본래 키프로스(Cyprus)는 베네치아와 관련이 깊었다. 베네치아공화국의 신앙의 원천은 ‘마가복음’을 쓴 성 마크(St Mark)였다. 제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고난 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넓은 지방을 다녔다. ‘마가’는 이 당시 바울사도와 함께 키프로스로 갔다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서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세운다. 베니스인들이 마르코 성인의 유해를 모셔오고자 했던 시도는 이집트가 이슬람교에 전도되어 있던 때라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베니스의 상인들은 마르코 성인의 유해를 베네치아에 모셔와 그가 안식할 수 있는 산마르코 바실리카(San Marco Basilica)를 세웠다.
지중해 동쪽에 치우쳐 있는 키프로스 섬이 베네치아의 수중에 들어오자 동방과 서방의 무역중개상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은 지중해와 유럽 전체를 향해 소유욕을 키우고 있었으며 부의 소유는 지중해 무역이 가장 큰 이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오스만제국이 모를 리 없었다.
1570년 오스만이 키프로스를 점령하자, 이 덩치 큰 거인을 상대하기 위해 베네치아는 교황을 중심으로 카톨릭신앙 안에 있는 무력들이 뭉쳐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1571 신성동맹을 통해 기독교 연합군을 구성하게 된다. 기독교 연합군 함대는 시칠리아 섬에 집결한 다음 오스만 해군이 기다리는 그리스의 코린트를 향해 그 기수를 돌렸다. 1571년 10월 7일 역사가 짙은 펜으로 기록하고 있는 “레판토(Lepanto) 해전의 시작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오스만세력의 캐톨릭 유럽세력에 대한 추가적인 도발에 힘을 싣지 못하게 했고, 중세를 떠난 서양문명이 근대에 안착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했다.
1571은 인간의 추상적 본질과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 삶이 갖는 관계에 대해 주리설(主理設)을 통해 인생의 존재적 가치는 본질에 있다는 형이상학적 접근을 했던 퇴계이황이 1월을 맞자 며칠이 안 되어 돌아가셨고, 바로크문예사조의 창시자인 ‘카라바죠(Caravaggio)가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이성중심의 사고가 옳은가? 돈키호테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인간이란 부류에 들 수 있다면, 이성주의 만으로 세상이 이루어져있지 않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며, 이는 들라크루아의 붓질로, 그리고 쇼팽과 슈만의 악보가 만드는 오브제들을 인간의 삶의 범위 안에 존재하는 것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근대는 신고전주의적 물리적 관찰과 낭만주의의 추상적 관찰의 협상이다. 결국 이 협상의 실패로 인류는 양차세계대전을 겪으며 ‘근대’와의 이별을 해야 했다.
1571년 10월 7일 레판토해전에서 왼쪽 팔에 영구장애를 입은 세르반테스가 술주정뱅이 미친 늙은이와 최초근대문학의 주인공이라는 두 상반된 지위를 ‘돈키호테’에게 짊어지게 했다. 교육은 이를 이해하는 인격과 지식을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일인가? 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망령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