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8(수)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교육개혁과 자유를 위한 시간여행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12월 28일은 현재 대부분의 나라가 사용하는 서양 달력인 그레고리력으로 볼 때,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시간을 3일 앞둔 날이다. 이날이 덧셈과 뺄셈으로 계산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유는 의열단원인 나석주(羅錫疇) 열사가 1926년을 마감하면서 치른 동양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 그날, 의연히 저세상으로 건너간 젊은 나석주를 찾기 위해 1926년이 먼저 정의되어야 한다.
일제 치하의 한반도는 공식적으로 모든 국민이 길가에 나서도 되는 두 번의 기회를 얻는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꿈으로 봉건 제후국의 가면을 벗어내고 황제국의 기치를 든 후로 제국은 두 번의 국상을 겪는다. 바로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의 昇遐(승하)다. 고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즉 장례일은 1919년 3월 1일이고, 순종 황제의 인산일은 1926년 6월 10일이었다. 이 두 번의 기회를 우리 국민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전자가 3.1운동이고 후자가 6.10만세 운동이다.
3.1운동의 물리적 허망함에 젖었던 대한제국인들은 곧바로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발족시킴으로써 재도약을 공언했고, 그 후 7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에서 제일 빠른 정신적 운동신경을 온통 움직여 차근차근 역사적 사건을 뿌리면서 1926년을 맞이했다. 연초인 2월 26일 도쿄 대심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무정부주의단체 흑로회(黑勞會)를 이끄는 박열(朴烈)과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의 특별공판으로 시끄러웠다. 그들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법정에서 한국어를 쓸 것임과 한복을 입을 것을 선언했고 도쿄 대심원은 이들의 요구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6.10만세 운동으로 민족정기를 확인하고,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출간을 바라보던 그해는 나운규가 단성사에서 <아리랑>을 상영하도록 했고, 조선어연구회가 지금의 ‘한글날’의 모태인 ‘가갸날’을 제정하도록 했다.
당시 일제에 의한 경제침탈의 총 본산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두 곳이었다. ‘척식(拓殖)’은 땅을 확장하고 자국민을 식민 하여 영토를 늘린다는 의미의 척지식민(拓地殖民)의 약어로써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말 그대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화하기 위한 정책을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식산(殖産)이란 재산이나 생산을 늘린다는 의미이다. 조선식산은행은 이름이 말하는 바에 따라 우리나라에서의 생산성을 일본의 태평양전쟁의 비용으로 전환하는 본부가 되었다.
김창숙(金昌淑)을 위시한 민족지도자들은 의열단의 젊은이가 이 두 개의 심장을 마비시킴으로써 일제에 교훈을 주기를 바랐다. 지금은 외환은행본점 좌측 화단이 되어버린 곳에서 1926년의 오늘 34세의 젊은 열사 나석주는 동양척식회사를 응징했다. 그가 던진 폭탄은 식산은행과 척식회사 두 곳 모두에서 불발했다. 일본 경찰과의 교전에서 끝까지 버티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적의 손에 맡기지 않기 위해 한 발의 총알은 스스로에게 할애했다. 그는 자기가 중국인이 아니라 대한국인 나석주임을 밝힐 때까지만 숨을 유지했다.
김우진과 윤심덕이 대한해협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가우디(Anton Audi)가 바르셀로나의 그란비아(Gran Via)에서 전차에 치여 순종의 인산일을 택하여 유명을 달리하고, 모네(Claude Monet)가 ‘모네의 정원’으로 유명한 지베르니에서 저세상으로의 여행을 선택하던 슬픔의 시대에 흐르던 조류를 따라 나석주도 이생의 고통을 마감했다.
교육개혁은 입시나 취직 등의 비 추상적 제도를 바꾸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음은 이렇게 짧은 시간여행을 통해서도 뼛속까지도 느껴지는 일이다. 단지 나석주 열사의 이생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던 1926년 12월 28일을 동감하는 것만으로도 교육개혁을 이룰 수 있음을 우리는 언제나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