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87년의 오늘, 7월 13일은 이스라엘이 신바빌로니아에 망하여 노예로 끌려간 ‘바빌론 유수’가 일어난 날입니다. 여기에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봅니다.
2021. 7. 12(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바빌론 유수(Babylon 幽囚)가 주는 시사점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Canaan)을 찾아 유대인을 이끈 것은 모세(Mosses)였고, 가나안 땅에 유대인을 정착시킨 것은 모세의 형인 아론(Aaron)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모두 예언가이며 제사장인 동시에 유태민족의 지도자인 ‘선지자(Nevi'im)’였다. 정교일치인 신정정치(神政政治)가 정치라는 분야를 분리해 내는 일은 하나의 민족이 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대부분 나타난다. 신의 계시와 인간의 진화욕구에 따른 정치적 판단력의 행사 간에 전자(前者)가 열위(劣位)인 경우가 되면 그것은 정치적 판단을 하는 세력이 이미 강력해졌음을 의미한다.
유대인이 스스로의 민족형성과정을 각성(覺性)하는 때는 아브라함(Abraham)과 그의 자식인 이삭(Issac) 그리고 손자인 야곱(Jacob), 3대를 거치면서 확립되었다. 야곱이 레아(Leah)와 라헬(Rachel)자매를 모두 아내로 맞아들인 후, 언니인 레아로부터는 10명의 아들을 보았고, 동생인 라헬로부터는 요셉(Joseph)과 벤야민(Benjamin)을 보게 되었다. 이 야곱의 아들 12명이 유태인의 ‘12지파(支派)’가 된다.
‘출애굽’의 고난을 거쳐 가나안에 이른 유태인은 서서히 신정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며 선지자들의 역할을 신앙과 예언, 그리고 왕에 대한 조언으로 한정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직접 다스리는 존재로서 ‘신(神)’ 대신 ‘왕’을 세웠다. 사울(Soul)이 초대왕으로 등극하자 통일된 이스라엘의 꿈은 서서히 익어갔다. 다윗(David)이 돌팔매로 골리앗(Goliath)를 이기고 2대 왕이 되자 이스라엘 12지파는 온전히 왕의 정치력이란 우산 속에 스스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통일된 이스라엘왕국을 이루었다.
솔로몬 궁전은 유태인의 자랑이자 족쇄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솔로몬의 영화는 신의 축복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국민들에 대한 저주(咀呪)였기 때문이다. 왕의 독재와 높은 세금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앗아갔다. 그리고 솔로몬의 장자(長子)인 르호보암(Rehoboam)은 아버지로부터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 대신, 그들의 신망을 져버리는 기술을 유전(遺傳)으로 확보했다. 솔로몬이 죽기 몇 년 전부터 왕에 대한 반발을 준비해 오던 여로보암(Jeroboam)은 왕의 사망에 때를 맞추어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르호보암의 유다 지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다른 모든 지파가 이에 동조하여 이스라엘(Israel)이라는 이름을 내 걸자, 솔로몬이 죽은 기원전 931년 유태인은 자연히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왕국으로 갈라졌다.
주변의 나라들이 왕국(王國)에서 황국(皇國)으로 세력을 넓혀가며, 앗시리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의 이름을 떨치는 동안 ‘하나님의 자식’들은 이들을 지배하는 세력이 아니라 기꺼이 이들의 속국이 되어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남에게 대항할 힘이 없을수록 별것 아닌 내부적 문제를 커다란 싸움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하여 유다왕국과 이스라엘왕국은 다른 민족의 힘을 빌려서라도 서로를 해치려고 노력한다.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캇네자르 2세 (Nebuchadnezzar II)는 ‘자신이 배려할수록 유태인은 더 반항하는 민족이다’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587년 그는 유태인의 상징인 예루살렘성을 초토화시키고 솔로몬궁전을 파괴할 것이었다. 7월 13일 일어난 바빌론유수(Babylonian Captivity)는 세계 역사에서 많은 은유적, 직유적 표현을 생산하는 용어이다. 아키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 (Cyrus II)가 느닷없이 신바빌로니아를 점령하지 않았던들 그들은 그 이후로도 얼마만큼을 바빌로니아의 노예로 지냈을지 모른다. 그는 마치 구세주처럼 아무 조건 없이 기원전 538년에 유태인들을 풀어준다. 정치세력이 아닌 미래의 대제사장 요아킴(Joiakim)을 지도자로 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슴에 많은 의미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나라나, 시대나 어떤 단체라도 위험이 감지되는 때에는 영락없이 진정과 솔직함보다 물질적 세계관이 힘을 과시하게 된다. 이미 2608년 전의 7월 13일 일어난 바빌론 유수는 외면화된 인격관과 물질화된 인생에 대한 판단기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노예’의 지위 이외에는 없음을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