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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왕 윌리엄과 헤이스팅스전투 학교 및 사회교육개혁

2021. 10. 13(수)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정복왕 윌리엄과 헤이스팅스전투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서양사 시대구분에서 고대는 서로마의 멸망과 그 주변의 사건들로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견이 아직은 많다. 이 의견은 그리스-로마의 화려한 문명이 게르만족에 짓밟혔던 시기로부터 문명에 대한 인식이 움터서 결국 르네상스를 맞이하기까지 천여년의 긴 세월을 중세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전기 중세는 오랫동안 그저 암흑시대로 치부되었고 후기 중세는 이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묘사되었다. 학자들은 이 노력들에 대해 ‘로마네스크(Romanesque)’와 ‘고딕(Gothic)’ 등의 이름으로 문화예술과 국가 모두의 발전단계를 설정하고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건설적인 표현을 그 결론으로 삼았다.


전기중세와 후기중세의 분수령에 위치한 전성기 중세에 놓여진 사건들 중에서도 꽤나 유명한 것이 노르망디 영주인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점령이다. 바이킹들은 그들의 인구가 적절히 많아지자 척박한 삶을 주변에 대한 침략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세기에서 9세기로 시간이 흘러갈 즈음 노략질로부터 아예 유럽의 땅들을 정복하여 삶의 터전을 바꾸어 나갔다. 롤로(Rollo)는 오딘(Odin), 토르(Thor) 등의 신들을 버리고, 기독교의 신들을 택하며 프랑스 북서부의 땅을 결국 차지했다. 신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땅은 바이킹이 속한 노르만(Norman) 족의 이름을 유지했다.


롤로의 5대손으로 태어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신실한 신앙심과 함께 왕은 전쟁을 통한 자본의 근거를 확보하고 정치는 재상(宰相)이 한다는 게르만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글은 쓰고, 읽고 싶은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제외되었고 미늘갑옷인 호벅(hauberk)을 입고 말을 탄 채 앞에서 돌진하여 전장(戰場)으로 내닫는 일은 의무로 느끼고 있었다.


앵글족과 색슨족은 원래 독일북부 앵글리아반도와 작센지역에 살던 민족이었다. 그들이 서로마가 멸망하던 즈음의 그 유명한 아더왕(King Arthur)의 무리를 서쪽 웨일즈로 밀어내면서 잉글랜드를 점령해 갔다. 이 두 부족은 같이 건너간 다른 부족 사람들과 웨일즈로 가지 않았던 잉글랜드 원주민들과 섞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종국에 앵글로색슨(Anglo-Saxon)이란 이름을 역사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잉글랜드 지배는 서기 1000년을 넘기자 해롤드 2세(Harold II)를 마지막으로 결국 바이킹의 후예에게로 넘어갔다.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는 실질적인 앵글로색슨왕가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가 자식이 없이 죽자 세 명의 왕위 계승자가 서로 자신의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나섰다. 워섹스(Wessex)가문으로 왕위를 이어왔던 앵글로색슨족은 워섹스와 친하지 않아도 권력 유지에 걱정이 없었던 고드윈(Godwin)가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해롤드 고드윈슨은 자신의 왕권을 주장했다. 노르웨이 왕이었던 하랄 3세(Harald III)는 바이킹의 후예들인 데인족 왕 크누트(Cnut)의 영국정복 및 통치와 연관지어 자신에게 잉글랜드 왕 계승권이 있음을 주장했다. 참회왕 에드워드는 크누트의 아버지인 스벤(Sweyn)이 영국을 침입하여 정령했을 때 노르망디로 건너가 후일을 도모했다. 이때의 인연을 근거로 삼아 노르망디의 왕 윌리엄도 영국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온 하랄드의 병사를 물리치느라 스탬포드 다리(Stamford Bridge)에서 힘을 다 써버린 해롤드 군은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 1066년 10월 14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계속된 윌리엄의 공격에 결국 무너졌다. 이 두 가지 전투로 해롤드와 그의 형제들 모두가 전사했으므로 윌리엄은 해롤드의 어머니와 전후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 해 성탄절 윌리엄은 정식으로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극하고 노르만왕조를 개창했다. 암흑시대로 평가받는 중세전반에서 후반으로가는 분수령 중 하나가 된 사건이 역사에 소개가 되는 장면이다. 그 이후로도 역사는 물질적 발전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발전의 의미는 물질적 걱정으로부터 자유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정복왕 윌리엄이 글을 모른다 해서 역사의 흐름을 문명으로부터 먼 곳으로 이끌었다면 역사는 그의 헤이스팅스전투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955년 전 오늘은 앵글로색슨의 마지막 왕 해롤드가 그의 두 동생과 함께 죽은 날이다.반면에 정복왕 윌리엄이 자신의 이름을 특이한 방법으로 역사에 남긴 날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을 거쳐 르네상스에 이르는 인류의 문명사에 바이킹의 족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풍족한 삶을 원한다. 그 ‘풍족함’이란 말이 지닌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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