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21(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시대의 흐름과 교육개혁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시대의 흐름’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향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시대를 인식함에 있어서 본질적 진정성이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역사의 흐름으로 파악하려는 의견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둘째는 상관된 일에 대한 일반적이고도 객관적 측면에서 관찰된 다수의 생각방향을 의미한다. 제4차산업혁명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아무리 일천(日淺)하고 그 기술의 이용도가 미천하다하더라도 앞으로 현재의 인류는 로보틱스(Robotics)와 사물인터넷(IoT), 그리고 빅 데이터(Big Data)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첫째 의미가 적시하는 ‘시대의 흐름’이다. 반면, 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한다거나 어떤 유행의 옷을 선호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의 기호에 그치는 한 그것을 ‘시대의 흐름’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학문과 진리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후자가 의미하는 시대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가치가 상승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정치는 사람들의 선호를 가까이서 관찰할 능력을 통해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교육과 교육개혁의 개념은 정치의 추구방향과 그리 가깝지 않아야 오히려 그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정치를 모티브로 한 교육시스템의 설정은 정치를 담당하는 세력이 일반 국민보다 훨씬 더 높은 교육철학과 교육인식이 가능했던 계몽주의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정치가 학문을 이끌 수 있는 조건은 학문의 결과물들이 정치로부터 파생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국가기관이 권력을 무기로 학계(學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유지되는 곳은 정치권력이 학문보다 우위를 점한 사회이며 세계적인 ‘시대의 흐름’의 첫 번째 의미로부터 이탈하여 정치적 인기와 학문의 정당성을 동형사상(同型寫像)으로 판단하는 집단이다.
시대의 흐름은 참으로 각박한 경우가 많다. 일제고사를 통해 어느 젊은이의 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기업경영에 연관시키려는 경영마인드는 불과 몇 년 안에 조롱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만 존재를 연명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한 평가로 일류대학을 판단하는 생각도 구식인 시대가 되었다. 아니 대학의 존재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는 시대에 세상은 이미 들어섰다. 다수의 사람들의 의식이 두 번째 의미의 ‘시대의 흐름’에 머물러 있건 말건 학문과 교육의 개념은 첫 번째 의미의 ‘시대’에 한정되어 있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기술경쟁은 인간 자체를 로보틱스의 수하(手下)로 다그치는 유능한 벡터(Vector)일 뿐이다. 디지털화된 기술과 그 생성물들이 인간의 창조물의 지위를 유지하는 방법은 아날로그를 이해하는 감성과 인격의 생성물로 인간의 지위가 유지되는 동안인 것이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평생학습능력이다. 그리고 학습이라는 용어는 흘러가고 있는 시대가 개념화한 기술적 우위성보다 우위의 개념을 담고 있어야 한다. 과학과 논리의 시대가 의지했던 환원주의(還元主義)는 인간의 존재가치가 분명히 기계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준(公準)으로 택했던 때이다. 그 근거가 허물어진 상태에서 아직도 우리의 교육은 ‘시대의 흐름’을 두 번째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인간은 기능의 우수성으로 파악되는 순간 로봇의 노예자리도 차지하기 힘든 존재인 시대가 현재이다. 적어도 기능적 총체에 더하여 감성과 불완전성에 대한 고민이라도 더한 전체론(全體論)적 존재로써 인간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때임을 우리의 교육관련 책임자들과 어른들이 알아야 한다.
기성세대의 자리를 이어 이 나라와 인류사회를 유지해 나갈 청소년들이 교실에서부터 수업과 유리된 상태로 있다. 학문과 진리와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시대적 흐름을 인식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정치에 머물지 않고 교육에까지 그 세력을 유지하는 체제는 이 사실을 가슴아파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것이 그저 개탄스럽고 한탄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