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4(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한국의 교육개혁이 표류(漂流)하는 이유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시간 흐름의 편린(片鱗)마다 삶의 의미를 투영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작용이 요구하는 일이다. 이 욕구가 교육이란 장치를 인류사에 편입시켰다. 치열한 삶의 과정 뿐만 아니라 먼 하늘의 구름처럼 유유(悠悠)한 태만까지도 의미를 가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은 의식을 필요로 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인생을 정의하려는 노력에서 온 것일 때만 인격적 가치를 지닌다. 무의식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물리적 방법으로 뇌사상태에 이르는 것이 철학적 가치를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떠한 방식이던 깨달음은 인간자체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에게 정의하는 과정과 병행한다. 그를 위해 필요한 장(場)이 시공간이다. 이를 죽음을 향한 3차원 공간의 진행으로 파악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도 모든 생물체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인지하는 쉬운 일이다. 따라서 인간적 의식과 이를 형상화한 교육의 시각에서 보면 늘 시공간은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이간에게 부여된 선재적(先在的) 조건이다.
가치의 생산은 인간이 가진 동물적 판단수단을 직접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오감(五感)이 생산해 내는 현상(現象)들은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철학적 정의능력을 고양하기 위한 성장배경에 머물러야 존재가치를 갖는다. 미각, 후각, 촉각, 청각, 시각이란 신경기관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향하지 않는다. 그것들로 자신 이외의 것들을 판단하고 정의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이것 자체를 발전시키는 일은 삶의 기술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그 기술의 정도가 인격의 정도를 재는 척도가 될 수 있다면 이것들에는 오직 무지하기만 했던 인류 역사의 성인(聖人)들을 그 위치에서 먼저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물질적 삶을 인간인식의 바로미터(Barometer)로 삼는 사회는 인간이 가진 감각적 재능에 몰입하느라 철학적 내면성을 띄엄띄엄 관찰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물질적 존재에 한정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런 물리적 사회는 사회적인 통괄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어있다. 어린 청소년들의 정신적 욕구조차 파악하지 못하여 그들에게 신념과 가치를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는 그 결과로 인해 일어나는 너무나 참혹한 인격의 방황상태를 숨기기 위해 새로운 정의들을 만들어 낸다. 인간의식의 내면이 이미 형해화(形骸化)된 무대에서 행해지는 인생에 관한 새로운 정의설정작업은 점수가 높을수록 행복하다느니, 등수가 높을수록 성공에 가깝다는 등의 거짓에 진실의 가면을 씌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의 교육개혁은 이 근본설정을 바꾸는 일이어야 한다. 이미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어른들에 의해 빠진 그 황망한 덫에서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을 어른들이 원하는 방향과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이 어떤 본질을 지녔는지 고민하는 일은 고통으로 치부된 지 오래다. 수업시간이란 무료한 공간은 그저 자야하는 것이란 선택지만 주어진 상태이다. 이 모든 것은 인생과 존재와 인간적 의식작용의 긴밀한 관계를 해체하고 오감적(五感的) 현상성(現象性)을 삶의 최종탐구로 설정한 결과들이다.
이를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조건들을 더하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가 택한 교육과 그 개혁의 방향이다. 본질은 이미 왜곡되어 있는 상태에서 표현의 피상성만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교육개혁을 이룰 수 없다. 진정한 역사의 퇴보를 물질적 풍요로 가린다고 해서 퇴보가 발전이 되지 않는다. 지금 한국의 교육과 그 무용론으로부터 제기된 개혁의 문제가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교육의 근본을 인격적 그리고 인간존재의 가치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전제하지 않은 개혁은 또 다른 개혁적 파행을 약속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라도 한국의 교육과 그 개혁안은 세상을 향하기에 앞서 교육이란 단어의 내면적 의미를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