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4(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이제 그만 가르쳐야한다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생산을 위한 자본의 소유방식과 그 결과의 분배방식을 놓고 사회체제간의 논쟁과 실험이 정치의 목적이었던 이데올로기 시대는 이미 유물화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물질적 소비를 근거로 계산되는 ‘복지’가 국가나 자치단체가 추구하는 우선정책목표라는 사실은 바뀐 바가 없다. 그리하여 현대라는 시대는 생산요소들에 대한 공정한 가격형성을 통해 파생된 수요와 공급을 하나의 현실공간에서 조우(遭遇)시켜 ‘시장’을 필요로 한다. 그 공간에서 거래되는 물품의 크기가 커질수록 삶의 질이란 객체가 ‘만족’지수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현대는 그 만족지수를 간단없이 채우고 또한 새로운 기준을 넣어서 만족의 개념 자체를 키운 다음 또 다시 채워야할 만족을 창출하는 일로 역사의 발전을 정의할 수밖에 없다.
동시대는 물질적 복지를 위한 투쟁이 마치 인간개념을 확보하기 위한 역사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어 왔다. 이러한 경향은 철학과 사고의 본질적 기능이 물질의 하부구조를 이룬다고 호도(糊塗)하는 사람이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시대를 만들었다. 물질에 부수(附隨)할 때 자유와 평등이란 말은 그 자체로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신적 부자유와 불평등에 관한 욕구는 인식하기 어려워진다. 물질적 평등과 기회의 평등이 같은 방향을 향해 있다고 이야기 하면 인식하기는 편하지만 사실은 이 두 가지 개념은 종종 서로 상반되는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역사에 던진 그림자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물질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을 접근하게 한 일이다.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히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가장 쉽게 이해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점수화와 서열화를 통해 우열을 쉽게 파악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간 자체를 놓는 일은 너무도 쉽게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조류를 받아들임으로써 동시대 교육이 재고와 비판의 대상이 된 이후에도 정신적 평등이 물리적인 조건들에 의해 그저 자연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고려할 틈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육이란 말이 본래적으로 필요한 정신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교과서와 교과과정이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들보다 우선되어 있다.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알고 있는 것에서 알아야 할 것들을 추출하지 못한다. 대신 그들은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나열한다. 교사는 교과과정에 의해 지시된 진행표를 이행해야 한다. 학생은 이 상명하달 시스템의 말단에 있다. 교육제도가 부르짖는 이해 위주의 교육은 시스템적으로 접근이 이미 불가능하다. 물질적 접근과 추상적 접근을 혼동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세운 체계가 그 기능을 혼돈할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생각할 시간을 빼앗긴 채, 문제를 풀고 공식을 외워야 한다. 그저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주어진 상태에서 알아야 할 대상과 그 깊이마저 미리 정해진 것들을 이행해야하는 부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에 ‘가르친다,’와 ‘배운다,’라는 용어를 대비시키는 것은 억지이다. 그러한 의미라면 이제는 정말 아이들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행위를 기초로 하여 아이들을 일괄평가하는 일도 이젠 그만 두어야 한다. 스스로 창조적 사유를 잃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 고정된 사고를 세상에 대한 깨달음으로 오해하여서 이를 일반화시킨 대가(代價)를 우리의 후손들이 치루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대가가 자유와 행복으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고 있다면 이는 더더욱 알 될 일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철학적 유랑을 할 자유를 가진 젊은이들을 키워 낼 능력을 우리 사회가 이제야 말로 가져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