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2(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양정의숙(養正義塾)과 교육개혁의 시대성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이 미국영어에서는 공립학교를 의미하는 반면 잉글랜드(England)에서는 교육에 뜻이 있는 여러 사람들이 의연금(義捐金), 즉 기부금을 출자하여 공동으로 설립한 사립학교를 의미한다. 영국의 왕실이나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이튼 칼리지’나 ‘웨스트민스터 스쿨’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퍼블릭 스쿨이다. 이들은 국가에서 정한 교육과정에 최소한의 규제만을 받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에 최대한 집중할 수가 있다.
1853년 페리제독(Admiral Perry)이 이끄는 불과 몇 대의 배에 ‘에도막부’시대는 그들의 쇄국정책과 함께 힘없이 무너져갔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서양문물을 향한 계몽주의적 성향은 그에게 서양식 ‘공부방’이라는 개념의 ‘학숙(學塾)’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영국의 퍼블릭 스쿨을 알게 되자 그 체제를 그대로 일본에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Public School을 ‘의연금으로 설립한 학교’라고 해석하여 이의 줄임말인 ‘의숙(義塾)’을 일본어로 삼았다. 그리고 마지막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시대 1868년 당시의 연호 ‘게이오(慶應)’를 따서 유키치는 지금의 게이오대학의 전신인 게이오의숙을 열었다.
엄주익(嚴柱益)은 영친왕(英親王)을 낳은 순헌황귀비 엄씨의 7촌 조카로서 1904년 근대화 된 일본의 문물을 접할 당시 현재의 국방차관급인 군무협판(軍務協辦)이었다. 그는 영국식 공동운영 사립학교라는 체제를 나타내는 말로써 유키치의 번역인 ‘의숙(義塾)’을 그대로 차용했다. 그리고 주역(周易)에 나오는 ‘어린 자를 올바로 기른다.’라는 몽이양정(蒙以養正)으로부터 양정(養正)을 추출하여 지금의 양정중학교와 양정고등학교의 전신인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열었다.
개교당시에는 신학문인 법학을 전문으로 개설하였으나 곧 경제학 과목을 신설하였다. 국권피탈 후 조선교육령이 시행되어 식민지 교육이 모습을 드러내자 양정의숙은 양정고등보통학교로 개명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엄주익은 민족교육의 방향성을 체육에서 찾고자 했다.
1936년 8월 9일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 마지막 시상대에는 영국인 한 명과 한국인 2명이 서 있었다. 독일의 위대함을 선전하기 위한 히틀러의 연출에서 세계의 각광을 받은 것은 한국의 건아 손기정과 남승룡이 있었다. 남승룡은 양정학교 졸업생이었고 손기정은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우리의 강토가 일렁였던 것은 그들이 일본 대표로 시상대에 선 것이라는 사실과 아무 상관도 없었다. 일본인들이 아닌 우리의 자랑스런 젊은이들로써 그들은 반도를 일렁이게 했다.
‘의숙’이란 말은 이후로도 우리나라의 풀뿌리 교육기관에 자주 등장하였다. 을사늑약의 설움을 딛고 국권찬탈에 대항하는 용사들의 자손들에게 교육을 통해 민족의 자립의식을 심어주려 했던 것은 융희원년 이상설(李相卨)이 용정(龍井)에 세운 서전의숙(瑞甸義塾)이었다. 독립군 간부양성을 지향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가 최동오(崔東旿)가 중국의 길림성에 세운 정치, 군사학교는 화성의숙(樺成義塾)이었다. 그리고 2년 후 경남 함양의 수동에서는 동네유지들이 젊은이들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신식학교를 세우기 위해 의연금을 모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동명의숙(東明義塾)이다.
시대적 파고로 인해 생기는 큰 일 들이 인간의 주변을 기웃대면 이를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모든 시대와 세대는 ‘교육’을 점검해 왔다. 이는 교육이 인간의 삶과 역사의 연계성을 철학적으로 잇는 단 하나의 소통방법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문제와 고통은 결국 교육의 역사에 대한 책임감에 속내를 드러낸다. 우리나라에 퍼블릭스쿨을 들여온 엄주익이 양정학교를 설립하고 첫 강의를 시작한 날이 115년 전 1905년의 오늘이다. 교육자가 시대의 전환기에 실천해야 할 교육개혁의 지표들을 상고하게 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