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31(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와 교육개혁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인간의 소리나 문자가 의미를 나르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소리나 글자가 아니라 의미(意味)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의 형성에 사회가 최소한의 정도라도 공통된 인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를 사용할 사회적 필요에 따라 먼저 그 만큼의 소리가 생기고 인간이 역사시대로 진화하는 과정에 의존해서 소리에 따른 글자가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리나 글자라는 형태적 요소들 자체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의미보다 먼저 세상에서 존재의 가치를 얻는 소리나 문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떤 소리나 글자가 인간이 인식하는 어떤 의미를 위해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점점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끊임없이 숨을 쉬어야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을 쉴 때마다 인식해야 한다면 존재의식이 존재자체보다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귀중한 사실은 오히려 정상적 삶을 위해 인식의 대상에서 낮은 지위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는 오히려 이 낮은 지위에 속하는 개념들이 매우 빠르게 모든 인간의 삶을 지배해 가고 있다. 그리고 동시대는 의미가 방법을 생산한다는 지금까지의 유일한 방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즉 물리적 현상, 그리고 그에 관련된 소리나 문자가 이성적, 그리고 감성적 의미를 창조하는 일은 이제 인류 스스로 원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집을 떠나 일을 하는 경우 집에 있는 가족들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휴대폰 또는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하나의 시장에서 교환할 수 있는 객체들이다. 이전의 시대에서 아버지를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은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비교대상의 위치에 있을 수 없었다. 이를 비교하는 일은 범죄의식의 경중을 따지는 일에 비유될 수 있을 터이었다. 물질과 그에 대한 욕망의 유행이 지금까지 존재해 온 단어들의 의미를 바꾸어 현 사회가 유물론을 보는 방향만으로 마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나눈 뒤 서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듯 의미들로부터 인격을 덜고 물질로 이를 채우는 것이 인간의 천부적 자유를 보장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현재이다.
나치와 일제의 731부대로부터 얻은 의료적 결과물들에 어떠한 이성적 판단이 접근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으로부터 스스로 인격을 분리해 낸 그 어떤 기형(畸形)들이 인격이란 존재의 가치에 육체를 담고 있는 '인간'들에게 행한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물질주의가 역사의 흐름에서 스스로의 존재가치의 한계를 깨닫게 함으로써 역사는 발전해 왔고 물질적 풍요는 그에 따르는 선물이었다.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의 역전(逆轉)은 적어도 지금의 인간세상이 추구해야 할 일은 아니다.
교육, 특히 우리나라교육이 개혁을 요구하는 바는 상술(上述)한 논리의 현대적 적용이다. 교육을 취업이나 대학입학 등의 기술로 해석하거나 물질적 풍부함을 달성함으로 인해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이미 교육을 시행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개혁은 어느 방향이든지 인간의 존재와 그 가치를 해석하고 그 의미를 탐구하며 인격적 경험을 얻기 위해 독서하고 철학적 사고를 위해 스스로 고민하는 사람을 기르려는 노력을 하는 누군가가 해야 한다. 올바른 의미의 교육이 적자생존의 원리로 가늠할 때 '적자(適者)'여야 한다. 인격적 가치를 기술의 진화에 연동시켜 교육의 본질적 의미를 현재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멸종할 대상으로 보는 훈련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 이제는 정말 교육개혁을 해야 할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