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30(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교육개혁과 전자(電子)의 발견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과학에서 ‘이성의 시대’는 ‘분석학(analytics)’이란 새로운 연구방법에 그 발전을 기대었다. 추상적 개념이라 할지라도 이성적인 분석이 가능해야 ‘존재’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정신이나 무의식까지도 이성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분석적이어야 했다. 분석(analysis)이란 행위는 대상이 어떠한 형태에서도 최소한의 성격을 유지할 때 부여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즉 물질은 아무리 미세하게 분해해도 ‘물질’이어야 하고,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분해해도 최소한의 단위로써 더 쪼갤 수 없는 ‘의식’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분석학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 그 무엇이건 최소한의 단위로써의 원자적 형태의 존재를 관용해야 했다.
모든 과학의 하부구조인 수학이 최소한의 수가 있다는 명제를 인용하여 ‘분석수학’을 탄생시키자 ‘이성의 시대’는 순식간에 온 우주를 인간의 탐구능력의 범위 안으로 옮겨 버렸다. 인간의 심리까지도 분석심리학적 도구로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만 터에 물리적 개념인 ‘에너지’가 질적인(qualitative) 모습만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에너지는 원자적 크기의 에너지인 양자(quantum)들의 집합으로 정의를 바꾸고 감히 그 개수가 셀 수 있는 대상으로 재탄생해야했다.
톰슨(J. J. Thomson)의 영국성공회교도로써의 신앙이 원자를 분석적으로 해체하는데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가 원자 안의 미립자로써의 ‘전자(electron)'을 발견한 첫 번째 과학자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크룩스관(Crookes Tube)이란 질 높은 음극관에서 양성자 한 개로 이루어진 수소원자보다 약 1800배나 더 가벼운 전하물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음극선이 빛보다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해 냄으로써 그것이 전자기파는 아니라는 것을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음극선의 전하(電荷)량과 이의 질량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입자로써의 지위를 부여했다. 결국 양성자보다 가벼운 입자 즉, 원자보다 작은 입자를 발견해 내었던 것이다.
새로운 음전하 물질은 그 최소한의 원형질인 양성자에 점점이 박혀서 그것과 일체를 이루어 자두푸딩 모델(plum pudding model)로 불리는 원자모형의 구성물이 되었다. 영국이민자들에 의해 세계인의 크리스마스 음식이 된 자두푸딩은 세월의 변화에 자두를 잃은 대신 건포도등의 건과를 품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는 그 이름이 제시하는 것 보다 훨씬 쉬운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톰슨모델을 이해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노벨상을 탄 톰슨의 8명의 연구조교들 중 하나인 러더포드(Ernst Rutherford)가 양성자로부터 전자의 존재형태를 독립시켰고, 역시 톰슨의 조교 중 한 명인 보어(Niels Bohr)가 양성자를 ‘핵’으로써 중심에 두고 전자를 궤도라는 정해진 범위 안으로 그 움직임을 제한함으로써 정해진 에너지 값을 갖는 입자로 개념화했다. 진정한 양자역학이 탄생했던 것이다.
도자기와 주물을 만드는 것과 같이 교육은 수학능력을 키우는 것이라 하여 도야이론(陶冶理論)으로 번역된 교육이론(discipline theory)이 있다. 추리력, 연산력, 기억력, 판단력 등의 정신능력이 다른 동물보다 더 크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이라는 존재의 우수성을 찾는 이 이론은 이 능력들을 크게 함으로써 인간적 존재가치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학습의 내용이 아닌 방법론에 교육의 본질을 두고 끊임없이 학생들을 지도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이 이론은 지도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면 갈 바를 잃는다. 그 형국이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적 상황이다. 교육이란 그 내용을 분석적으로 연구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본질적 의미를 구현할 수 있다. 정신능력은 일률적이 아닌 개개인의 특성에 부합한 분석적 방법을 통해서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97년 4월 30일 오늘은 캐번디시 연구소의 톰슨이 영국왕립과학연구소에서 전자의 발견을 공표한 날이다. 청소년들의 능력은 최소화하여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를 분석적 연구대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없어질 수 없는 그 능력이 반대로 좌절의 기운을 얻는다. 그리하여 전체주의적 개념의 추락시점을 찾는다. 우리나라에서의 교육개혁이 철학적 가치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