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5(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민족상잔(民族相殘)에 관한 단상(斷想)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지금과 같은 국가개념(國家槪念)이 자리 잡은 것은 시장의 전개과정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자본주의 이전시대의 생산양식을 창출한 자본의 형태를 모두 묶어서 전기자본(前期資本)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음은 다분히 자본주의의 오만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에서 유물론적 관점을 배제하지 못 하는 한 어차피 물질의 소유와 다양성의 크기가 삶의 복지수준을 결정하는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하고, 또한 물질을 생산하는 자본(資本)을 기준으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근거를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초기자본(初期資本)시대를 거치며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을 성숙단계로 이끌자 산업자본(産業資本)의 출현이 자본(capital)의 개념을 담당하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천부적 권리로 이미 자리 잡은 인간의 자유권을 군주의 지배권을 대체할 수 있는 지위로까지 끌어 올리면서 '자유시장의 원리'는 경제원리를 넘어서서 정치원리가 되었다. 한
물질로 파악된 이 세상의 삶에 있어서 자유는 물질적 풍요로 계산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로 이름 지어진 물질주의는 그것이 본원적으로 안고 있는 생산과 소비의 문제 그리고 교환이 일어나는 '시장'이란 장소의 경계에 대해 확고한 개념을 종용했다. 그 개념의 구체적 결과가 '국가'였다. 시장을 최대한 차지하기 위해서 자본의 주체들은 '영토국가(State)' 또는 '민족국가(Nation)'사상을 편리한 대로 요구했다. 민족과 영토와 국가의 성립이 필연적이지 않던 시대에 이들을 연결시키려 한 것은 시장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릴 수 있는 매끈한 방법이었다.
민족주의의 유혹에 가장 먼저 매료된 것은 후발 자본주의국가들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민족국가적 사회주의의 매력을 나찌즘(Nazism)이란 용어에서 발견하였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민족의 단합이란 명목을 파시즘(Fascism)이란 말에 구현하고자 했다. 민족이란 유행하기 쉬운 개념을 바탕으로 일시 성공가도를 달렸던 이 정권들은 '민족국가'란 개념을 사람들의 뇌리에 확정하고는 곧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자본주의의 시장원리 자체에 의문을 품은 다른 후발 국가들은 생산양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라는 계급구조가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생각을 가진 공산주의는 마르크스(K. Marx)의 분석에 따라 각 시대에 있어서의 '지배자'들이 그 시대의 생산수단인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따랐다. 이들은 생산양식과 잉여물의 분배방식에서 '유통'이라는 개념의 개입을 최소화 했고, 이에 따라 시장에서 자유를 퇴출시켰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실패는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이데올로기의 위치에서 추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양차세계대전이 종언(終焉)을 고하자 그 이후의 문제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존재해야 해결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이 두 사상의 경쟁으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가질 수 없었다. 이미 이 세상은 물질적 발전의 결과로써 거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사고(思考)의 형태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의 방법을 그 자신이 선택하게 둘 수 없었다. 마침내 강요된 두 이데올로기의 대결장으로써 역사는 우리나라를 선택했다.
뼈아픈 민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고도 아홉 해나 지났다. 통일이란 명제가 정치경제적 합리성보다 열위가 될 만큼 세상은 변했다. 필자의 세대는 이해할 수 없지만 통일을 원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 또한 현실이다. 우리 민족의 현명함이 어떤 방법으로 역사라는 공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