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6(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신성로마제국의 기일(忌日)에 보는 일본(日本)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서로마와 동로마의 정치, 종교적 관계는 미묘한 것이었다.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서로마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자, 세계의 중심이 된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야만인의 땅이 되어버린 로마를 측은해 하는 것 이상의 태도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에 의해 ‘교회를 세울 반석’으로 지명된 베드로가 당당히 순교한 곳이었다. 그가 심어 놓은 기독교적 상징은 이후로 순교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피로 물들여져 유럽종교의 중심으로써의 위치를 로마로부터 누구도 앗아 갈 수 없게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는 사라진 제국에서 종교적으로는 교회의 수장(首將)임을 자처해야 하는 상황이 곧 로마주교를 괴롭혔다. 결국 교황 레오 3세는 게르만의 최고 통치자 샤를마뉴(Charlemagne)에게 서로마의 재건을 의지했다.
800년 12월 25일의 대관식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조차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명명할 기회를 줄 정도의 불명확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서로마가 멸망한 후 유럽제국이 ‘신성로마’라는 형식을 통해 존속해 왔다는 견해는 나폴레옹의 욕망을 불태웠다. 마지막 황제 프란츠(Franz) 2세를 퇴위 시키면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랙산더(Alexander)와 씨이저(Caesar)에 견주었다. 그러나 베토벤(Beethoven)의 제 3번 교향곡의 주인공으로써, 그리고 공화론자들의 ‘영웅’으로써가 아니라 로마의 황제로써 역사에 기록되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전쟁의 실패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로마는 오래전에 멸망했다. 그런데도 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마저도 스스로 로마의 후예임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형식적 제도에게까지 신성로마라는 명칭을 수여하여 정통성을 이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로마가 담당한 ‘고대(古代)’라는 시대를 인류가 키워나갈 유산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명은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시대의 발전은 그 이전 시대까지의 축적된 문명의 발현에 불과하다. 바로 그것이 구축해온 정신적 가치가 인류의 발전을 모색하게 하는 근본이다. 이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탐구의 대상으로 로마는 모범이 되어 왔다.
그러나 딱하게도 면면한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배우려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진(先進)이라는 자격을 종종 그 지위와 그로부터 도출된 힘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시대의 영화(榮華)를 자기만의 것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늘 헛된 결론을 가지고 왔을 뿐인데도 말이다. 로마의 후예가 되려는 노력의 발로(發露)가 이러한 수준에 이르러 동로마의 궤멸과 신성로마제국의 멸망 그리고 나폴레옹의 측은한 결말로 표현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역사는 그러한 속성을 가진 존재들로부터 역사의 흐름을 담당하는 지위를 회수하는 냉엄함을 예외 없이 보여 왔는데도 말이다.
근간에 우리는 이웃나라가 이러한 역사적 시험대에 스스로를 올리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아시아적 가치를 포기하는 일과 근대화의 정도를 동일시해서 얻은 물질주의의 성과에 이웃나라들 전체를 고통에 몰아넣는 기술을 도출해 내는 그 나라의 정치인들이 또 한 번 자신들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1806년 8월 6일, 오늘은 신성로마제국의 멸망이란 의미를 찾기 힘든 사건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싸워 온 나폴레옹의 공화(共和)정신이 본질을 잃은 날이다. 역사는 수도 없는 예를 통해 후손들의 실수를 지적하고, 존재의 본질을 고민하게 한다. 그리하여 역사는 자신과 인류사회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려는 이웃의 예를 통해 지금의 형색(形色)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묵상함으로 주어지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가치와 인류사회에서의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