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22(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교육개혁의 현실적 방법 찾기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 대리인이 황제라는 생각은 기독교 중에서도 정교(Orthodoxy)신앙이 더 튼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이 때문이었고 차르(Tzar)에 대한 믿음을 거두어들이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었다. 종교와 정치가 뒤섞이면 정치지도자는 논리성을 잃기 쉽되 독재자적 권력을 가질 확률을 키울 수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은 1차산업을 밀어내고 ‘생산된 생산품’이란 수식어를 가진 공업생산시설들이 ‘자본’의 중심개념을 차지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때였다. 더구나 산업혁명의 결과가 유물론(唯物論)을 앞세운 현실주의자들에게 종교를 ‘마약’으로 폄하할 힘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의지가 ‘신’의 의지와 경쟁할 수 있는 발판이 생긴 터였다.
1905년 1월의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가폰신부(Georgy Gapon)가 이끄는 무리는 나르바 개선문(Narba Gate)을 지나고 있었다. 콧수염이 멋있던 이 러시아정교 신부는 황제의 근위병들로부터 총격을 받기 전까지 니콜라스 황제가 신앙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날 나르바 문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부심을 내려놓고, 대신 역사의 한 페이지에 ‘피의 일요일’이란 용어가 쓰여 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마르크스(K. Marx)가 진단한 정치권력의 최종형태는 ‘무정부(無政府)’이고, 이러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개념에서 종교는 온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러시아정교와 러시아라는 국가와는 논리적으로 가까울 것 같지 않은 공산주의 이념이 러시아에서 세계최초로 시도되었다는 사실은 인간과 사회라는 본질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정신세계와 물리적 현실이 다름을 인정 할수록 정신적 순수함은 보장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정신적 가치가 순수함을 지향할수록 물리적 현실로부터 멀어질 우려를 낳는다. 그 격차가 너무 커지면 이 각각의 세계를 지지하는 사회계급은 각각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그리고 이 두 계급이 하나의 사회 속에서 공존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면 이를 통합하려는 기운이 혁명을 일으킨다. 정신적 순수함이 요구되는 정도가 종종 물질세계, 즉 현실에서부터 멀어진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경우가 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은 현실과 괴리된 정도가 그 한계점을 지나고 있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한국의 학생들이 자신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존재하지 않을 직업을 위해 하루 15시간씩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교육이 제 갈 길을 찾기 위해 공청회를 열고, 논쟁의 장을 베풀고, 끊임없이 대안제시를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의 교육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 많은 교육선진국들의 선례를 공부하고 공부해도 그들의 흉내조차 내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푸틸로프 금속 공장(Кировский Завод)이 노동자들을 해고시켰다. 그리고 거기에 가폰 조합원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일 이 사실에 러시아혁명의 근본이 있다면 그 형식성의 극치로 인해 역사는 왜곡되고야 말 것이다. 지금 한국의 교육의 왜곡이 학교조직이나 교사들의 문제라거나, 학원 등의 사교육에 의지하려는 국민적 성격이 그 근원이라거나, 입시정책이나 학력평가 등의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은 그것 자체로써 이미 그들이 교육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한 인식에 뿌리를 둔 교육개혁시도는 그 어떠한 것이 되었든 이미 한국의 교육문제를 바꿀 힘을 가지지 못한다.
오늘은 ‘피의 일요일’이란 사건을 역사에 새긴 날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 황제와 러시아 민중들의 그것이 정상적 방법으로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괴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교육은 모든 물리적 사실을 잉태하는 그 무엇이다.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육의 본래적 의미를 바로 잡기 위해 삶의 본질에 관한 담론이라도 시작할 시기에 왔음을 최소한 지식인들이라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앨빈 토플러가 예견했듯이 한국인 스스로의 힘이 아닌 남의 강제에 의해 현 사고의 시스템이 바뀔 시대를 맞을 수 있다. 한국의 교육과 교육본래의 개념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정도의 괴리가 생기면 우리는 한국인이란 현재의 개념 자체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