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5(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보스턴 학살사건과 교육개혁의 양태(樣態)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동양일보) 휴 와이트(Hugh White)일병에게 한낱 가발제조업자의 도제(徒弟) 따위가 대영제국을 아메리카대륙에서 몰아낼 빌미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단지 개릭(Garrick)이란 젊은 친구가 자신이 속한 부대의 장교에게 외상대금을 받기위해 행하는 무례한 언사를 꾸짖을 의도를 가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싸움의 도화선이 되고 식민지 사람들이 급기야 교회의 종까지 쳐가며 이 말다툼의 현장에 모여들자 그는 자신이 위험한 상태에 빠졌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주민들에 둘러싸여 속수무책으로 그들이 던지는 물건과 욕설을 견딜 수밖에 없었던 화이트일병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 한 명의 하사관과 그를 따르는 6명의 사병들이 온전하게 그 상황을 진정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주민들의 “총을 쏴보라.”라는 외침이 동반된 몸싸움의 어느 즈음에서 진짜 총이 발사되자 현장은 즉시 피범벅이 되었다.
영국은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현장에 있던 8명의 병사들을 모두 기소했다. 그리고 그 중 2명에게 실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의지로 불타고 있던 식민지 사람들은 그 사건에 단순한 사건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독립파들은 총 5명이 죽은 이 사건에 ‘학살’이란 용어를 붙였다. 보스턴 학살사건(Boston Massacre)이란 인문학적 단어가 주는 정치적 색채에 대해 미국인들은 ‘기회’의 의미를 영국인들은 ‘억지’의 개념을 도출해 내었다. 영국인들에게 이 사건은 그저 “킹가의 우발적 사건(Incident on King Street)”이어야 했다.
미국인들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사실을 이 사건에 어떻게 체화할 것인가를 모의하는 사이 세계사는 중세의 ‘농노(serfdom)’계급을 ‘시민(citizen)'계급으로 대체해야 할 기회로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의 독립'이란 미국의 사건이 '시민혁명'이란 세계사적 사건의 첫 장면으로 교과서들에 기록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독립을 쟁취한 미국인의 투표는 '자동성 원리'의 구현장치가 되었고 이를 통해 국민은 피지배자가 아니라 권력의 존재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는 이 사건을 ’시민혁명‘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민이란 새로운 계급이 혁명을 통해 그들 자신의 존재에 역사의 주인공이란 가치를 확립한 것이 세계사가 보는 미국혁명의 본질이다.
적어도 그 방향성에 관한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역사가 발전하는 생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담당자가 ‘신’이 아닌 ‘인간’임을 선포한 사실에 근,현대라는 용어를 할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휴(Hugh)일병과 개릭(Garrick)도제의 사소한 말다툼에 신으로부터 인간 자신에게 ‘자유’의 주체라는 지위가 이동한 사실을 유보(留保)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인문학적 시각에서의 자유를 가진 ‘시민계급’을 형성할 조건들이 시민혁명을 통해 확보되었다고 해야 역사는 적절한 동의를 표현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의 왜곡은 불과 몇 명이 죽어나가는 정도의 사건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 되어 버렸다. 왜곡된 환경에서 왜곡을 정상으로 인식하여 이를 개혁하자는 논의자체와 그 결론이 존재할 곳을 왜곡된 공간으로 한정한 것은 이미 교육개혁이 아니다. 1770년 3월 5일은 미국인들이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요구했던 천부적 자유를 가진 ‘시민’이란 계급의 형성을 위해 주저 없이 보스턴 학살사건(Boston Massacre)을 미화(美化)했던 날이다. 역사는 자신의 물줄기가 막히면 깃털처럼 가벼운 일마저도 ‘혁명’이란 어마어마한 사건에 혼융(混融)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역사는 본래의 물줄기를 확보하고야 만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역사가 의도하는 자유의 본질을 논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시점에 있다. 물질과 형식이 인생의 본질인 것같이 왜곡해 놓은 시스템에서 이제 교육이란 이름을 거두어야 할 역사적 사명을 우리는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교육이 존재하는 그 지역 안에 교육이란 이름을 위치하게 하고 그 범위 안에서 일어나고 진행되는 것에 교육의 작용이란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이 역사의 요구에 편법으로 대응하지 말고 당당히 눈을 맞추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이를 회피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