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교육개혁과 인간본성론(人間本性論) 해석
한희송(ESI 교장)
르네상스가 신본주의(神本主義)에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철학의 바탕을 이동시키자 곧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신이 인간사(人間事)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을 모두 주관한다는 생각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나가는 모습과 그리고 그 최종적 결론이 모두 신의 섭리라는 의견에서 온 것이었다. 신이 모든 면에서 섭리한다면 인간은 운명을 갖게 된다. 운명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구조에서는 도대체 신이 보통 사람들에게 자유를 줄 것 같지 않았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서야 했다. 신의 섭리를 거부하기 위해서 인간은 운명론을 재해석해야했다. 그것이 인간은 모두 같은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인정하는 자연법사상을 탄생하게 했고, 국가는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 계약의 산물이라는 '사회계약론'을 등장시켰다. 만일 이 계약 당사자인 인간들의 계약행위가 합리성을 가진 것으로 규명된다면 그 계약은 자연법적 정당성을 부여받게 될 것이었다. 이것이 서양의 '자연상태론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이라는 동양의 용어로 로크(J. Locke)와 홉스(T. Hobbes)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 적절한지의 논쟁을 떠나면 그런대로 이들은 각자 맹자와 순자를 서로 같은 편으로 인식하기 어렵지 않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자연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보았고, 반면에 로크는 인간생명을 빼앗는 일은 오진 인류의 평화와 보전만을 위해서만 허락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를 향한 역사가 그 현실적 성과를 보기 시작한 근대는 이들 이론들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체계에 뿌리를 틀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인간의 사고의 변화는 이 시대를 논리와 이성으로 특화했고, 인간의 역사로 하여금 발전적 경로를 찾아 현대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현대는 스스로의 발전을 거듭하여 구조주의를 비판하며 감성과 이성의 구분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던졌다. 그 회의적 측면에서 바로 사람들은 논리적인 오류에 정당성을 수여할 감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기회의 평등에서 학생들의 학습적응력은 논의될 자리도 얻지 못한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다르면 이미 교육의 평등은 허물어진다. 그런데 그 결과의 불평등은 학생들의 개인적인 몫으로 돌리면 된다. 학생들의 학습능력과 적응력은 천차만별이고 교육의 결과가 발현되는 시기와 그 인성적 결과는 아이들마다 다르다. 따라서 교육은 아이들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시스템은 철저히 형식적 객관성을 지향한다. 그에 따라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배우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하향식 구조가 정당성을 얻고, 같은 수준의 교과서와 가르치는 교사의 평준화를 지향한다. 이 형식적 평준화에 감성적 정당성을 실어서 그 결과는 이 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경제체계와 성악설과 성선설의 인간본성론 그리고 민주주의와 전제주의라는 정치체제를 연결하는데 있어서 자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성선설을 하나의 집합으로 구성하고 싶어 한다. 논리적으로는 진정한 공산주의에서 사람들은 '일하고 싶은 만큼 가지고, 일할 능력이 있는 만큼 일하게' 된다. 개인적 욕심이 없는 성선설적 인간이 바로 마르크스가 의미하는 공산주의자들이다. 반대로 자본주의는 일한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필요성의 잣대로 잴 수 없다. 그 성악설적 인간적 본성을 인정함으로써 자본주의는 물질적 발전에서 공산주의를 앞선다. 하지만 북한이 성선설적이고 남한이 성악설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남한사람들에게 감정적 불편함을 준다. 성선설이 좋고 성악설이 나쁘다는 감정적 판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악설적 접근이 성악설적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성선설적 접근이 성선설적 결과물을 내는 것과는 아무 논리적 관계가 없음에도 자본주의와 성선설의 감성적 관계는 유지된다.
지금 우리는 성선설적 접근과 성선설적 결과를 감성적으로 연결시키는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사실과 현실을 이성적으로 보고 그 현상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근대와 현대가 아닌 미래적 시각을 도출하려는 노력에 기대야 한다. 그래야 교육개혁의 논의라도 할 기초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