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30(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현재 교육개혁안들의 논리적 오류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우리나라에서 교육개혁안들이 개혁적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 방법을 교육자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질 자체를 정치적 수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 그리고 교육방법의 개선만으로 교육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등이 여기에 뿌리를 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수교육감과 진보교육감의 차이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을 발현시키지 못한다. 바로 교육의 본질로부터 이미 유리된 방법적 시각만을 교육개혁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 명제는 서로 대별시킬 때 ‘참’은 더욱 ‘참’의 모습을 띄고 ‘거짓’은 더욱 ‘거짓’으로 인식된다. 이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참’과 ‘거짓’은 사라지고 ‘서로 대별한다.’라는 인식만 남기 쉽다. 이 때 ‘참’과 ‘참’을 병렬적으로 위치시키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뒤에 온 ‘참’을 ‘거짓’으로 인식한다. 또는 ‘거짓’과 ‘거짓’을 대별시키면 전자의 ‘거짓’을 ‘참’으로 인식한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종류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예술적으로 오브제를 인식하는 것은 공부를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이다. 명화를 보면 그림이라 시큰둥하고, 명곡을 들으면 잠만 오는 학생이 다른 과목을 공부할 때는 그 내용을 더욱 활동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괴상한 믿음이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참’인 명제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과 음악, 그리고 체육을 전공하려는 학생은 공부를 안 해야 하고, 예체능 이외의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은 적어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면 그림이나 음악, 체육에 대한 관심을 최소화 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참’과 ‘참’을 대별시키거나 ‘거짓’과 ‘거짓’을 대별시킴으로 오는 비논리적 인식이다.
“교육을 통해 더 좋은 직장에 더 많이 취직시키고 더 안정된 수입을 보장하겠다.” 라는 슬로건은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더 깊은 철학과 인격을 가지게 하겠다.” 라는 슬로건과 매우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사실 더 깊은 철학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쉽고 더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기 쉽다. 그런데 전자의 선거공약을 내 건 후보자가 후자의 선거공약을 내 건 후보자를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몰아세운다면 사람들은 쉽게 그 페다고기(pedagogy)에 속는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이 정치의 일부분으로 전락한 이유이다.
엄마가 아이를 사랑해서 안아주는 일을 관찰해 보자. ‘사랑’이 원인이고 ‘안아주는 일’은 결과이다. 그런데 전자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주관적인 사건이라 오감으로는 관찰할 수가 없고 후자는 물리적이고 구체적이며 객관적 사건이라 오감으로 관찰할 수가 있다. 따라서 사랑을 평가하려 하면 ‘안아주는 행위’를 먼저 관찰하고 거기에서 ‘사랑’의 정도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접근하는 순간 이것은 귀납적 추론에 불과하게 된다. 학문적 행위는 귀납적일 수 있지만 학문의 개념 자체는 귀납적 접근이 허용되면 그 본질을 훼손할 가능성을 안게 된다. 물 한 방울에 두 방울을 더해도 한 방울에 머물 수 있다. 이런 경험을 가졌다고 해서 1+2=1이 될 수도 있다면 적어도 이것을 수학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를 안아주는 행위가 ‘사랑’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랑’의 본질은 표류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결국 사람들은 ‘사랑’은 잃고 ‘사랑의 방법’으로 ‘사랑’을 대체한다. 그래서 자식을 두 번 안아준 엄마는 적어도 한 번 안아준 엄마보다 모정이 크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작금에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시대의 무정형성을 학문과 교육에 대입하려한다. 교육의 현실적 기능이 직업적 안정에 있다면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식의 접근이다. 이는 역시 ‘거짓’과 ‘거짓’을 대립시키되 사람들이 전자는 ‘참’인 명제라고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교육개혁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일들은 결국 기존의 교육에 대별된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들어서 새로운 접근은 ‘참’인 교육개혁으로 인식하게 하는 일에 불과하다. 우리는 교육개혁을 논함에 있어서 우리의 후손들이 겪을 철학적 빈곤을 자발적 실업이 가능한 물리적 풍요로 대체할 수 있다는 사고로부터 우리 스스로 벗어나는 일이 먼저여야 함을 인식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