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23(일)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풍향계/ 트로이전쟁의 연대특정과 에라토스테네스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는 전형적인 천재였다. 어린 시절 고향 키레네(Cyrene)에서 보낸 후, 당시 학문의 집합지였던 아테네(Athens)로 옮긴다. 당시 아테네는 학문적 욕구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살고 싶은 충동을 느끼도록 하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키티움(Citium)의 제논(Zeno)’으로부터 ‘삶의 가치’에 대한 추상적 접근방법에 대해 도움을 받았고,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고, 지동설(地動說)을 최초로 주장했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와 친교를 맺으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알렉산더는 최대한의 많은 지역을 취합해 나가기 위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 지휘관들을 지역에 따라 분산시켰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골디안 매듭(Gordian knot)’을 잘라버린 사건이 지닌 의미를 따라 아시아를 모두 지배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쪽으로 원정을 계속했다. 자신과 자신의 부하 사령관들이 정복한 지역에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붙이던 관례에 따라 알렉산더는 계속 ‘알렉산드리아’들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 인도를 삶의 마지막 원정으로 하고 그는 이승을 떠났다.
일단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관들이었던 ‘디아도카이(Diadochi)는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에 각각 스스로의 가문으로 왕가를 꾸렸다. 그러자 통일되었던 그리스 문명은 이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주된 문화를 일구는 바탕이 되었다. 이를 “헬레니즘 시대”라 한다. 이는 각 지역의 지배자가 된 디아도카이들이 새로 지중해 지방의 중심이 된 ‘로마’에게 권력을 내어 주고 그리스의 마지막 전쟁인 ‘코린트 전투’로 그리스 전체가 로마의 지방으로 전락한 기원전 146년까지 유지되다가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의 부관은 ‘프톨레마이오스(Ptolomy)’였다. 처음에는 알렉산더의 유산 전체를 차지하기 위해 그의 시신을 확보했다고 주장했으나 디아도카이들의 힘겨루기에 힘을 쏟고 난 후 그는 이집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을 장식한 ‘프톨레마이오스’왕조가 탄생한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고대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라는 역사상의 이름보다 ‘코’의 높이로 미모의 평가를 받게 된 클레오파트였다. 그녀는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고 코브라의 독에 운명을 맡김으로써 ‘파라오’라는 이집트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기원전 30년에 이집트는 결국 로마의 땅이 된 것이었다.
프톨레아미오스 3세의 초청으로 아테네 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간 에라토스테네스는 당시의 세계에서 최고를 자랑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파라오를 도왔다. 몇 년의 근무를 뒤로하고 도서관장으로 승진한 그는 모든 방면의 천재답게 많은 문화적 학문적 유산을 남겼다.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여 현재 기술의 결과와 큰 오차를 내지 않는 신통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정수론에 있어서는 ‘수’를 체에 걸러내는 방식으로 소수(素數)를 산출해 내었다. 그리고 날짜를 특정하는 계산의 틀을 만들어 고대의 사건들에서 스스로의 믿음으로는 정확한 시기를 생성해 내었다. ‘일리아드’의 묘사에 의하면 오디세우스의 아이디어에 따라 그리이스 군인들은 모두 철수한 것 같은 연극을 꾸민다. 그리고 용기 있는 자들이 안에 숨어있는 목마(木馬)를 트로이 성문 앞에 놓아 둔다. 트로이 사람들의 노력으로 목마가 성안으로 이동되자 밤에 몰래 목마 밖으로 나와서 트로이 성의 문을 연다. 이날이 트로이 함락의 날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이 해가 기원전 1184년이었고 그날이 4월 24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과학이 너무나 발전한 현재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에서 호기심이 한 명의 천재를 길러내고 그로부터 열리는 문명의 과실(果實)에 후손들이 대대로 의존하는 것을 보면서 교육이 왜 필요하며 호기심과 역사는 인간의 시대에서 어떤 끈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