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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寬容)의 날’은 무엇을 기념하는가? 학교 및 사회교육개혁

2023. 11. 16(목)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관용(寬容)의 날’은 무엇을 기념하는가?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매년 11월 16일은 국제연합 교육, 과학과 문화기구인 유네스코가 정한 ‘국제 관용의 날(International Day for Tolerance)’이다. 1915년, 간디(Mahatma Ghandi)는 비폭력과 관용이란 매우 수동적으로 보이는 운동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적으로 남아프리카에서부터 인도로 돌아왔다. 인류역사에서 핍박을 받는 자가 오히려 핍박을 주는 자의 정신적 ‘부자유(不自由)’를 불쌍히 여긴 이 뚜렷한 금자탑은 비폭력적 관용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만천하에 그 가치를 보였다.


1963년 마틴 루터 킹목사는 ‘워싱턴행진’을 끝내는 자리, 링컨기념관의 앞쪽 계단에서 "I Have A Dream"이라는 ‘폭력’ 대신 ‘관용’을 부르짖는 연설로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간디와 킹 목사는 모두 총탄이란 폭력에 육신을 바쳤지만, 인도의 독립과 인종차별철폐라는 인류역사가 진정 가고자 했던 길을 향해 문을 연 사람들로 자신들을 신의 반열에 올렸다.


유네스코는 1995년 인간이 역사에서 인간의 본성을 잃고 헤메일 때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가게 했던 것은 폭력과 복종을 통해 남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사랑’, ‘인내’, 등으로 표현되는 ‘관용’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이 원칙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 인류가 존재하는 그 시간까지 사라지지 않을 진리의 한 측면이었던 것이다. 이를 되살리고 그 본질적 의미가 인류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할 핵심적 표현임을 문서화 했고 그 다음해인 1996년에 모든 회원국을 대상으로 제 1회 세계관용의 날을 선포하게 되었다.


관용의 한자인 寬(관)은 ‘너그러울 관’이며 容(용)은 ‘얼굴 용’이다. 즉 ‘너그러운 얼굴’을 의미한다. 다만, 이 때 ‘얼굴’은 단순한 표면적 얼굴이 아니라 내면적 성격과 품성으로 자연히 드러난 얼굴을 의미한다.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 뿌리를 틀고 살면서 가장 필요한 영양소는 ‘관용’이다. 관용을 가지지 못한 시대가 필연적으로 품는 것, 그러니까 ‘관용’의 반대말은 ‘몰이해’이다. 몰이해(沒理解)라는 것은 ‘미움’, ‘폭력’, ‘불안’ 그리고 종국적으로 ‘패망적 결과’를 열매로 맺는 지독한 나무이다.


그러나 몰이해가 맺는 열매는 쉽게 눈에 띄는 물질들이고, 관용이 맺는 ‘사랑’, ‘용서’ 그리고 ‘배려’ 등의 열매는 육신적 눈에 띄지 않는 추상들이다. 그래서 물질적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관용’보다 ‘몰이해’의 결과물에 열광하기 쉽다. 어떤 것이 관용이란 뿌리를 사람들의 가슴과 인간의 문화에 자라게 하고 사랑과 용서 등의 열매를 맺게 하는가? 또한 어떤 방법으로 몰이해란 뿌리는 인간의 본질에서 자라고 미움과 폭력과 멸망이라는 열매를 맺게 할까? 이러한 질문에 많은 종류의 답을 낼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교육이다.


UN총회는 1996년 11월 16일을 ‘세계 관용의 날’로 선포하면서 관용에 대해 “이 세상 모든 민족과 사람들의 다양한 문화와 인간으로써의 표현방법들을 인용(認容)하는 것.”이란 정의를 붙였다. 그리고 관용은 어떤 대상을 단순히 좋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세계의 문화와 천부적 인권, 그리고 자유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차별 또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적대감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관용’을 논하는 것이므로, ‘사회적 동물’의 본질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서로 돕고 이해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 천성이라는 인간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요즈음 교육의 현장에서 ‘남’을 이해하는 과정 없이, ‘나’ 또는 ‘우리’라는 울타리를 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많다. ‘나’와 ‘우리’의 범위가 ‘나’나 ‘내 자식’을 가르치는 스승까지도 제외할 정도가 되었다 한다. 이는 ‘선생님’이 설정해야 할 ‘나’나 ‘우리’의 개념에서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나 그 부모들이 제외되는 반작용을 낳는다. 관용은 제외되고 ‘몰이해’가 대신 뿌리를 틀고 경쟁, 다툼, 폭력이라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키운다. 도대체 어떤 시대가 이런 세상을 내 자식의 미래를 위해 주는 선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을까? “세계 관용의 날”만이라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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