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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명, 그리고 교육의 존재공간 학교 및 사회교육개혁

2024. 8. 29(목)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역사와 문명, 그리고 교육의 존재공간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동양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아프리카의 나일문명이 “비옥한 초승달지대(Fertile Crescent)”라는 개념으로 통합된 뒤 지중해라는 해로(海路)와 소아시아라는 육로(陸路)를 통해 그리스로 건너간 것이 유럽문명의 시작이다. 서양은 그리스와 그 문명을 이어받아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로마를 합쳐서 역사적 용어로 ‘고대’를 규정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페니키아(Phoenicia)의 튀르(Tyre)라는 왕국의 공주였던 ‘유로파(Europa)는 ’소‘로 변장한 제우스에게 납치되어 크레타 섬으로 가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 ’아게노르‘는 아들들을 시켜 유로파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크레타의 왕인 아스테리온(Asterion)과 결혼하여 그곳에 이미 정착한 동생을 그녀의 남자형제들은 데려오지 못한다. 사랑하는 딸 ’유로파‘를 찾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그냥 그리스에 정착하게 되는데 장남인 캐드머스(Cadmus)는 테베왕국을 건설하였고, 그의 동생 킬릭스(Cilix)는 지금의 튀르키예인 소아시아 지방의 동남쪽에 왕국을 열었으며, 막내인  페닉스(Phœnix)는 아버지의 왕국을 이어서 그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부여할 수 있었다.


유로파는 제우스와의 사랑으로 낳은 세 명의 아들 중 미노스(Minos)가 크레타의 왕이 되어 유럽최초문명인 크레타 문명을 열고 곧 이를 아테네 지방과 펠로폰네소스 지방으로 전하여 그리스 본토문명이 비상할 수 있게 했다. 


결국 메소포타미아문명과 나일문명은 페니키아를 통해 그리스문명과 로마문명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사실 그리스 본토라는 개념은 에게해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섬들과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에게해의 해안 즉,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넓게 퍼진 작은 왕국들이 그 문명의 산물들을 공유함으로서 세계역사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 사실의 지리적 명칭이다. 


현대의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그리스 문명이 존재론적으로 자기들의 것으로 주장하는 근거가 여기에 존재한다. 


이후의 지리적 구분에서 사실 한 덩어리인 ‘유라시아’대륙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개의 대륙이 있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사람들의 구분으로 유럽의 동쪽 끝인 그리스와 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는 튀르키예는 두 개의 대륙이 만나면서 서로를 견제하는 첨병의 역할을 부여 받았다. 


고대문명에 머물러 있을 때 같은 문명이었던 에게해의 양쪽 해안은 중세로 역사가 자리를 옮기면서 철저하게 단절되어 갔다. 그리스는 동로마의 중심으로써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고, 에게해의 동안(東岸)은 사라센의 자식들로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밀어 내고 이씨왕가의 뿌리를 튼튼히 하기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조선이 바쁠 때, 오스만제국의 술탄인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동로마를 무너트렸다. 4세기 기독교국가가 된 로마는 그 ‘수도(首都)’를 그리스-로마 신들의 흔적으로 가득한 ‘로마(Rome)’를 떠나서 기독교의 성당과 기념물들로 채울 수 있는 새로운 동네인 ‘비잔틴’으로 옮겼다. 콘스탄틴황제의 이름으로 개명된 도시가 기독교의 환경에서 이슬람의 중심으로 바뀌어져 ‘이스탄불’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1453년이 되자, 유럽문명이 점철을 시작한 그리스는 역사에서 없어지고 오스만이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19세기가 되어 오스만이 힘을 일게 되었을 때 ‘그리스 독립’이란 이름의 운동이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다시 찾기 위해 힘썼고 1830년에 사실은 ‘독립’이 아니라 역사에서 없어졌다가 새롭게 생긴 나라인 ‘그리스’가 유럽의 관심을 받았다. 1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적으로 편성된 동맹국에 오스만제국이 발을 들여놓자 전쟁의 승패는 곧 오스만의 승패와 직결되게 되었다. 오스만의 멸망으로 튀르키예가 나라없는 땅이 될 무렵 후에 ‘아타튀르크’ 즉 ‘투르크의 아버지’가 된 케말 파샤는 젊은이들을 모아 ‘공화국’을 세우려는 꿈으로 ‘터키’ 독립운동을 일으킨다. 


우리나라가 삼일운동으로 이 세상에 민족의 독립이란 개념을 확연히 하던 1919년 케말파샤는 터키의 둠루프나(Dumlupınar)에서 8월 30일 결정적인 전투를 승리한다. 현재의 튀르키예가 ‘승리의 날’로 지정한 오늘을 이해하려 해도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없는 의견은 스스로만이 아니라 국가의 발전까지도 ‘운(運)’에 맡기게 된다. 역사와 문명, 그리고 지식의 공간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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