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14(목)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학생인권조례는 폐지되어야 하는가?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인간은 사회를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구현한다. 한 사회를 유지하는 구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한 인간의 인격과 존재개념을 구체적으로 연관시키는 일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집합적 개념의 ‘사회’와 개별적 의미의 ‘인성’이 갖는 관계의 성격이 뚜렷해진다면 ‘국가’와 그 구성원소인 ‘개인’ 사이의 상관성이 더 명확해 질 것이고 이로써 사회의 구성방법과 개인의 존재가치가 갖는 함수적 관계를 더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성론(人性論)을 근거로 국가의 정치적 행위를 결정하려는 시도는 대략 네 가지의 의견으로 종합되었다. 첫째는 맹자(孟子)로부터 시작된 성선설(性善說)이다. ‘인간의 본질이 선하다’는 생각은 서양근대사상의 첨병이었던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통해 ‘계몽’과 ‘인간의 선한 본성’이 만난 결과물이 ‘사회’라는 해석을 낳았다. 사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계몽될 가능성 즉 본질적으로 선한 심성의 크기에 의존했을 것이었다. 인간은 결국 계약을 했고 사회가 형성되었다.
둘째는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이다. 성공적 치도(治道)를 위해 정치지도자가 택할 현실은 ‘악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함으로 올바르게 결정된다. 서양의 사회계약설과 천부인권설의 도약기에 홉즈(Hobbs)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의 상태에서 ‘사회’가 잉태되는 자연적 과정이 ‘절대적 권력을 쥔 왕정’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맹자와 인성론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고자(告子)의 생각이다. 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갖는 인성은 선하거나 악하다고 결정지을 수 없다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했다. 경험론적 측면에서 사회계약론을 설파(說破)했던 영국의 로크(Locke)는 교육에 대해 ‘한 사람의 소질을 그가 타고난 본성에 따라 발전시키는 것’이라 정의함으로써 ‘고자’와 비슷한 인성론을 주장했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는 결정에 의존해서는 나오기 힘든 의견이다. 타고난 본성은 교육이란 통로를 통해 볼 수 있는 인간의 기질적 특성일 뿐,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옳거나 그릇된 것으로 판단할 단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와 로크의 생각을 더욱 인성론으로부터 멀리해서 사회에 인성의 개입을 최소화하면 ‘법(法)’만이 사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따라서 ‘사회’가 극단적으로 객관화된 형태인 ‘국가’의 운영방법은 주관성을 기반으로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철저히 객관화된 ‘법’이어야 한다. 이것이 네 번째 주장인 한비자(韓非子)의 법가사상이며 서양 근대가 왕이라는 인간의 자율적 지배에서 벗어나 천부적 인권을 실현할 방법으로 주창한 오직 비인격적 법률만이 지배의 주체일 수 있다는 ‘법의 지배(Rule of law)’사상이다.
성문화된 법만을 진정한 법으로 간주하는 몰인정주의의 극단이 ‘법실증주의’이다. 그 대표학자인 ‘옐리네크(Jellinek)’마저 법이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했다. 도저히 도덕으로 풀 수 없는 극단적인 부분에 들이대는 잣대가 법의 정의라는 말이다. 즉 법이라고 해도 그것은 도덕의 일부분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인가? 교육은 사회계율 중 도덕의 중심에 본질을 걸치고 있는 객체인가 아니면 도덕의 최소한이란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 계층적 말단인가?
학생인권조례는 도덕인가 아니면 도덕으로 지켜지지 않아 학생의 인권을 최소한이라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법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이미 학생인권조례는 허구이며, 후자인 경우라면 이미 교육현장이 비도덕적 기초위에 서 있다는 뜻이다. 교육이라는 개념이 학교 울타리 안이라는 기하학적 범위 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면서 왜 학부모들은 교사들을 교육자가 아닌 성악설적 대상으로 인식하려 하며 그 반대는 또 어떻게 해서 성립할 수 있는가?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해야한다, 아니면 존치해야한다 라는 논쟁만큼이라도 가정과 사회로부터 성악설적, 성선설적, 성무선악설적 또는 법치주의적 평가의 대상으로 우리의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삼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교육의 미래가 있을 수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