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16(화)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교육의 본질과 교육개혁의 방향
한희송(에른스트 국제학교 교장)
원래 정치와 교육은 매우 이질적인 분야이다. 정치는 자고로 국민의 선택을 근본에 두기 때문에 현실성이라는 멋진 이름을 포퓰리즘(populism)에 입힐 수 있다. ‘국민이 원해서’라는 이유로 여론을 자기 뜻대로 호도(糊塗)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의 본질에 늘 기생한다. 그러나 교육은 아무리 현실적 측면으로 국민을 이끌고 가서 물질적, 경제적 성과를 이룬다 해도 그것이 인격의 위치를 물질에 가깝게 했기 때문에 오히려 본질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물질적 진화를 이루었음에도 아직 청동기 시대나 초기 철기 시대에 살았던 부처, 공자, 예수 등의 귀한 인물들이 인간사회의 중심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들이 방향에 따른 치우침에 근거하지 않고 구심적 진실만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화가 물리적 사실을 가리킨다면 이들은 이미 인간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분들이 되었을 것이다.
교육은 물질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과 본질이 겹치지 않는다. 수학적 논리는 수학문제를 풀어서 학교점수를 높이는데 목적을 두는 순간 이미 그것은 ‘교육’이란 범위 내에 존재하지 않는 기술습득의 문제로 전락한다. 그 논리를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달하는 ‘생각’이 그 사람을 본질적 존재에 대해 더 논리적으로 고민하게 하되, 다만 그 외부적 형태가 시험점수, 또는 물질적 삶의 선택과 부수적 관계를 가질 경우에만, 수학공부가 인류역사에서 교육으로 용인(容認)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교육을 몸소 경험한 사람 중에 정치라는 현실에 가담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을 세상의 흐름에 맞게 조율하고 방향과 방법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물리적 세상의 맛을 아는 정치인들이 교육을 이끌려 한다면 그 의미가 아무리 선량하다고 해도 올바른 길에서부터 이미 교육은 멀어져 간다.
우리나라에서 교육문제가 상존(常存)하고 그를 위한 처방이 본질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치우쳐 흔들리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정치가 교육을 이끄는 현실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과 그 현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나타나는 모습에 따라 열심히 개혁된 결과, 학생들의 인권이 짓밟히거나 스승이 그림자는커녕 목숨자체를 제자들에게 의존해야하는 극단적 현상들과 마주쳤다. ‘스승’과 ‘제자’는 본질과 진리로부터 가장 먼 쪽에 있는 정치가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에 의존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 사실자체로 이미 교육은 본질적 허상을 그 중심에 갖게 되었는데도 아무도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그저 ‘여론’과 정치적 선택이 차지한 이 나라의 교육은 본질을 잊어버린 채 허수아비로 전락한 자신을 되돌아 볼 양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로마는 정치적으로 세 가지 단계를 거쳐 진화하고 쇠퇴했다. 기원전 753년 왕국으로 출발한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공화국으로 진화한다. 아무래도 공화국이 왕국에 비해 시민의 권리를 보전하기 쉽다. 로마공화정은 시민의 권리를 기반으로 점점 발전해 나갔다. 결국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걸치는 거대한 지역을 ‘로마’라는 이름 아래 거느리게 되었다. 그런데 로마는 왜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바뀌었을까? 그것은 진화일까? 퇴화일까? 제정을 선택한 로마는 지금까지 서양고대문명의 정점으로 인식되면서도 왜 그 종말은 그토록 처량할까?
지금으로부터 2천년도 더 된 기원전 27년 1월 16일 오늘, 시저(Caesar)의 의붓아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최초 황제로 등극하며 ‘성스러운 자’라는 의미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를 황제가문의 이름으로 택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조차 넘지 못한 원로원의 권위를 발아래에 두고 후세가 잊지 못 할 로마제정의 첫 주자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철학을 통한 본질에 대한 탐구가 보조하지 않았다면 로마는 2천2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인류의 재산들을 만들어 낸 정치세력으로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이 피로 물든 당쟁의 역사 속에서도 세계 역사에서 드물게 긴 왕조를 엮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싸움마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앞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형식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삶의 철학으로 존재했다. 율곡이나 퇴계가 주장한 것들은 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현실정치에 대한 저급한 욕설이 아니라 인간 본질을 철학적으로 순수화한 기록으로 전해진다. 올 해에도 교육개혁을 위한 많은 정책들이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퇴색하게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 ‘책’을 읽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