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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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Introduction.........................................................................................................4
1. Purpose of Investigation...............................................................................................................4
2. Method and Range of Investigation............................................................................................4
Ⅱ.Renoir, 그는 누구인가.......................................................................................5
1. 어린 시절 .....................................................................................................................................5
2. 마지막 30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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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Renoir가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9
Renoir, Impressionism...............................................................................................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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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Conclusion........................................................................................................11
※ 참고 문헌
Ⅰ. Introduction
1. Purpose of Investigation
본 essay는 Renoir Painter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800년 후반, 세계를 뒤흔들었던 Painter 중 한 명인 Renoir가 세상을 어떤 부분에서 놀라게 했는가와 다른 화가들과는 특별함이 묻어나는 그의 작품에 묻어나는 어떠한 이유를 알아내고자 이 Essay를 썼다.
2. Method and Range of Investigation
본 essay는 인터넷의 정보와 Renoir에 대한 서적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본 essay는 제 1장 서론과 제 6장 결론을 제외하면 본론은 총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론의 첫 번째 장, 주제는 Renoir의 생애에 대해 세세하게 다룬다. Renoir의 어린 시절과 마지막 생애 30년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본론의 두 번째 장, 주제는 ‘Renoir가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을 주제로 내용이 시작된다. Renoir와 Impressionism을 관련하여 자신은 작품을 그리면서 무엇을 나타내고 표현하고 싶어했는 지에 대해 중점을 두었다. 본론에 따른 결론을 도출해내었다.
Ⅱ. Renoir, 그는 누구인가
어린 시절 Renoir
1841년 2월 25일 프랑스 리모주에서 태어난 르누아르는 가난한 중산계급 출신이었다. 아버지 레오나르(1799-1874)는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재단로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1845년, 르누아르의 가족은 프랑스 리모주를 떠나 파리로 떠나 더 좋은 생활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현실을 나아지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회화와 드로잉에 재능을 보여 도자기 공장에서 도제로 일하기 시작했다. 13세이었을 시기에 르누아르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으며 커피잔에 작은 꽃이나 전원의 양치기, 마리 앙투아네트 옆모습을 그려 넣었다. 르누아르는 물감의 반짝이는 광택과 섬세한 음영, 가끔은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느낌을 부여해 계속 발전해나갔다. 그러고는 4년 동안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으로 일했다. 그러나 산업 혁명의 여파로서 그의 생활에는 변화가 생겼다. 르누아르를 비롯한 도자기에 그림을 찍어내는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린다. 그는 숙녀용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해외 선교사들이 사용하는 깃발에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에게 이런 경험들은 붓을 민첩하게 또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르누아르가 21살이 되던 해,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었다. 1862년 4월 르누아르는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게 된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고전 회화나 석고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위주로 가르쳤다. 그러면서 르누아르는 많은 스승에게 배웠지만, 그의 진정한 스승은 20년 전 알레고리 회화로 유명세를 펼치던 샤를 글레르였다. 르누아르는 글레르의 개인 화실에 다녔기도 했다. 르누아르는 점점 성장을 하며 타고났던 성향과 로코코 회화를 모사하던 영향으로 강렬한 원색의 사용 빈도가 잦았다. 그렇지만, 르누아르가 즐겨 사용하던 방식은 학교의 정서에 맞지 않았다. 르누아르의 스승이었던 글레르와 마찰이 생긴 이유가 바로 위와 같았다. 글레르의 화실에서 르누아르와 같이 마찰을 일으켰던 인물이 또 있었다. 그는 바로 클로드 모네였다. 그러한 이유였는지 르누아르와 클로드 모네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클로드 모네는 외젠 부댕에게 자연광의 조건에서 풍경화 그리는 것을 배웠다. 화실의 차가운 빛보다 자연광을 훨씬 선호하기도 했다. 1863년, 낙선전에서 르누아르와 화실 친구들과 같이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보았다. 당시, 대중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았었지만, 르누아르와 친구들에게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서로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다. 1864년, 글레르가 은퇴를 하자 르누아르를 비롯한 친구들은 스승을 두지 않고서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모네는 퐁텐블로 숲 속으로 친구들을 데려가 자연을 그리도록 하였다. 모네 말고도 이미 퐁텐블로 숲 속에서 자연을 느끼며 그림을 그리는 카미유 코로라,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등 많은 화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퐁텐블로 숲 근처 고향의 이름을 따서 ‘바르비종학파’라고도 불렸다. 당시엔 자연, 시골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그들의 방식은 비판받는 대상이었다. 1864년 르누아르는 처음으로 살롱전에 입선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중 <Notre-Dame de Paris>에서 영감을 얻은 <영소와 함께 춤추는 에스메랄다>라는 작품이었다. 바르비종학파 중 한 명인 디아즈는 르누아르에게 어두운 색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고 충고까지 해주는 친한 친구이다. 비록 나이 차이는 57세와 23세로 많이 나긴 하지만, 경제적인 부분에서 지원 또한 해주었다.
르누아르가 당시 존경했던 화가들로는 구스타브 쿠르베와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쿠르베는 사실적인 회화를 그렸으며 자연 그 자체에서 뿜어져나오는 것을 선호했다. 또 다른 화가는 외젠 들라크루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낭만주의의 문을 열어준 화가이다. 고전주의가 이끌고 있던 시대에 다채로운 색상을 사용해 생생한 사실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모두 틀에 박힌 회화에 벗어나고 싶어했다. 1865년, 르누아르는 시슬레와 함께 배를 타고 센 강을 따라 르아브르까지 갔다. 그래서, 르누아르의 뱃놀이는 르누아르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제가 되었다. 살롱에서 르누아르의 작품을 다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1년 뒤, 살롱 측에서는 엄격한 기준을 세웠다. 이때부터 새로운 미술 양식을 창안하기 위해 르누아르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르누아르는 퐁텐블로 근처의 마를로트 마을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왔다. <앙토니 아주머니의 여인숙에서>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르누아르 자신의 친구들을 그려 넣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레벤망>지에 실린 기사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장면이다. <레벤망>은 젊은 졸라가 1866년 살롱전에 대한 평론을 기고해 예술 작품은 "한 사람의 기질을 통해 자연의 한 부분을 보는 것이다“라고 정의해놓은 정기간행물이다. 또한, 친구들을 뒤쪽 벽을 보게 되면 <라 보엠>을 쓴 앙리 뮈르제르를 그려놓은 것도 보인다. 젊은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보헤미안이라 칭하며 세상이 알아주지 않은 가난한 예술가로 생각했다.
1867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