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Introduction
제주도 4.3사건 이 무엇인지 언제 일어났는지의 궁금증이 생겨 이번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4.3사건은 대한민국 사람이 꼭 알아야 하는 필수적인 역사이다.
위키백과에 등재되어있는 내용위주로 에세이를 작성 하였고
본론 첫 번째 파트인 8.15 光復 이후 韓半島와 濟州 상황 4.3이 일어나기 전 꼭 알아야 하는 background에 대해 서술했고 광복절 이후 우리나라의 상황과 제주도의 상황, 제주도의 역사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본론 두 번째 파트에서는 제주 4.3 사건의 始發點 즉 제주 4.3 사건의 시발점 기마경찰에 의해 시작되는 3.1 발포 사건과 제주도민 41200여명이 총파업을 해 기마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려는 3.10 총파업에 대해 서술했다.
본론 3 번째 파트엔 제주 4.3 사건의 발발 The outbreak of the Jeju Incident 제주도민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나 무장봉기하여 우익세력에게 투쟁하는 과정과 같은 민족을 사살하지 않으려는 여순사건 여수의 군대들의 반란과 과정에 대해 서술했다.
마지막 본론 4번째에는 사회주의 자로 낙인 찍힌 제주도 섬의 아픔과 학에 대해 서술했는데 학살에는 같은 민족이 같은 민족을 오인하여 사살하는 가슴 아픈 일과 자비 없이 무차별적으로 끔찍하게 죽이는 일의 증언을 작성했다.
II. 8.15. 光復 이후 韓半島와 濟州 상황
1. 韓半島 상황
1945年 8月 15日 光復 이후 韓半島는 큰 危機에 빠졌다. 우리 韓半島에는 제대로 된 政府가 없었고, 北에는 蘇聯군이 借地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美國군 들은 이렇다가 韓半島 全體가 共産主義로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여 南쪽으로 오게 되었다. 그것을 美/蘇군정기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으로 나누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不安해 하고 있을 때, 당시 美國에서 유학을 하고 온 [1]李承晩 박사가 全羅北道 井邑에서 井邑發言을 한다. [2]井邑發言이란, 臨時政府를 세워야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고, 北쪽은 [3]共産黨이 차지하고 있으니 南韓만이라도 [4]臨時政府를 세우고, 選擧를 하자라는 내용의 發言이다. 러나 많은 民族 指導者들이 反對를 한다. 그리하여 美國이 UN에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본다. UN이 말하길 그냥 직각 統一 시켜라 그리고 國會議員 選擧를 시키라고 말했다. 그 말에 蘇聯은 反對 그리고 방北을 금지 시켰다. 그러나 UN은 그 말에도 屈服하지 않고, 南쪽만 國會議員 選擧를 시켰다. 李承晩 박사의 井邑發言처럼 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그때, 그것에 反對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金九 先生이다. 그분은 南쪽에서만 選擧를 하는 것이 아니라 北쪽도 같이 選擧를 하자는 趣旨였다. 그리하여 金九 先生께서는 北쪽에 가서 金日成을 만나고 會談을 가지며 選擧에 대한 決定을 내렸다. 그것은 蘇聯과 美國이 韓半島 일에 干涉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미 選擧를 하기 위해 準備가 다 끝난 狀態 였다. 그래서 그것은 無算되고 選擧가 시작 되었다. 그는 南 과 北이 같이 選擧를 하지 않으면 나는 選擧 투표를 하지 않겠 다라고 말씀했다. 그러자 UN은 당신 마음대로 해라 말리지 않겠다고 그랬다. 그리고 南쪽 혼자 총 選擧를 치루게 된다.
2. 濟州의 역사
朝鮮時代 때 濟州島는 有配지 였다. 그래서 光海君 秋史 金正喜 등등 朝鮮時代에 2000여명이 濟州로 有配 되었다. 또한 朝鮮時代 때의 苛酷한 眞相과 扶域으로 苦痛을 많이 받았다.
[5]日帝强占期 때는 濟州島가 日本과 가까운 이유로 濟州島 의 남자들을 日本에 [6]徵用, 徵兵으로 끌고 갔고, 日本이 망하기 전에 [7]地政學적 要衝地였던 濟州島를 軍事基地로 私傭했다. 그때, 日本人들이 濟州島를 가미가제 特攻隊 기지로 삼았다. 여기서 가미가제 特攻隊가 무엇이냐 면, 가미가제 特攻隊 란, 自殺 特攻隊로서, 제 세계 2차 전쟁 때 日本이 美國을 [8]攻擊하기 위해 지었던 特攻隊이다. 自殺 特攻隊는 空軍들이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海軍중에서도 自殺 特攻隊가 있었다. 그래서 日本人들이 濟州島에 동굴을 뚫어 잠수함을 많이 숨겨 놓는데 私傭했다.
3. 濟州의 상황
우리나라가 光復을 한 후 美군이 우리나라에 들어 오는데 濟州島 는 1달 늦게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은 濟州島 에 日本人 警察들이 많아 ‘大韓 獨立 萬歲’도 외치지 못했고 日本人 警察들은 濟州島民들을 威脅했다. 그때, 日本人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그 나쁜 짓이 무엇이냐 면, 物資를 뒤로 빼서 팔아버렸다.
또한, 日帝强占期 때는 [9]供出制 라는 稅金을 걷어가는 제도가 있었는데, 日本人들이 濟州島民들이 기르고 가꾼 안 그래도 별로 없는 穀食들을 稅金으로 걷어 가서 다시 濟州島民들에게 配給으로 나누어 주는데, 濟州島民들이 보는 앞에서 그 穀食들 석유를 부어서, 불을 붙여 태워버리는 끔찍한 行動을 했다. 그 뒤 美군들이 濟州島에 왔다. 濟州島民들은 美군이 왔을 때만 해도 살 수 있다는 生角에 기뻤다. 濟州島民들은 美군이 왔으니 [10]親日派들, 親日派 警察들을 全部 處置해 줄 것이라고 生角 했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나라의 警察들이 없었다. 日帝强占期가 끝났을 때여서 警察이라고 하면 日本人 警察, 親日派 警察들 밖에 없었다. 자꾸 親日派 이야기를 하는데 親日派가 무엇이냐 하면, 日帝强占期 때 우리나라 사람들 중 우리나라를 背信하고 日本의 앞잡이가 된 사람을 부르는 名稱이다. 親日派 警察들이 濟州島로 오게 되어 濟州島는 더 힘들어 지게 된다.
濟州島는 섬이라는 意味에 ‘島’ 자로서 全羅道에 속했었다. 그러나 濟州島가 慶尙道 全羅道 같은 意味의 ‘道’로 바뀌며 全羅道에서의 物資 支援도 끊어지고, 稅金도 더 많이 걷어가게 되어 社會的으로 힘들어 졌다. 또한, 그때가 日帝强占期가 끝난 직후여서 日本에 끌려갔던 濟州島 사람들 6만명이 다시 濟州島로 오게 되면서 [11]失業率도 높아지고, 傳染病도 돌고, 作物도 잘 자라지 않아 먹을 것이 없었다. 그때 親日派 警察들이 美군에게 濟州島가 섬이 아닌 道가 됬으니 警察들을 더 [12]支援 要請해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1947年 2月 200여명의 親日派 警察들이 濟州島로 오게 된다. 이때, 온 警察들은 濟州島에 있는 親日派 警察들을 응원 해주기 위해 濟州島로 온 警察로서 응원 警察 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