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제 2차 침입
Ernst Schule Internationale
학 년 12학년, 11학년, 10학년
이 름 이동하, 이가현, 김동현, 조지형
2018. 9. 15
거란의 제 2차 침입
지도교사 Kevin
이 Essay를 역사시간 보고서로 제출함
2018년 9월 15일
Ernst Schule Internationale
학년 12학년, 11학년, 10학년
목 차
Ⅰ. 서론
1. 연구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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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의 목적과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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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Ⅱ. 본론
1. 전쟁 직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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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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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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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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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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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 연구의 방법
본 Essay에서는 거란의 2차 침입에 대하여 조사를 했습니다. 대부분 연구의 방법은 인터넷 백과사전과 학술 논문을 이용하였습니다. 또 한 인터넷 백과사전으로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를 이용하였고, 역사책을 이용하여 정보를 찾기도 하였습니다.
2. 연구의 목적과 범위
본 Essay의 연구의 목적은 거란의 2차 침입의 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이번 Essay의 연구 목적이였습니다. 연구의 범위는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4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장에서는 전쟁 직전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두 번째 장에서는 거란의 2차 침입에서 가장 중요한 강조의 정변을 다루었습니다. 다음 세 번째 장에서는 전쟁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3장에서는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마지막 4장에서는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이후 상황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본 Essay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Ⅱ. 본론
1. 전쟁 직전 상황
고려는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이후 거란이 돌아가고서 994년(3월 즈음으로 추정) 즉각 송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994년 6월 성종이 송나라에 ‘고려는 아직까지도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증오 한다’라는 글이 담긴 국서를 보냈으며, 997년에는 목종이 이부시랑 주인소를 파견하며 ‘고려가 송을 따르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국서를 전했고 이후로도 계속 비밀리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한 후 하공진은 강조에게 협력한 대가로 동료 유종과 북방 양계에 주둔하게 된다. 1010년(현종 1년) 봄, 유종이 고려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동여진 부락을 공격하였다 패전한다. 이 당시 유종은 화주를 주둔하고 있었는데 여진의 사신들이 고려를 방문하여 수도로 향하다 화주에 머물고 있었다. 유종은 동여진을 공격했다가 패전했다는데에 앙심을 품고 여진의 추장과 그 수행원 95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학살로 고려에 깊은 원한을 갖게 된 여진은 거란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고려에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한다. 여진이 원한을 호소하며 거란에 협조하자 거란의 요성종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요종이 여진의 추장과 그 수행원들을 학살한 사건 역시 거란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일들이 있기 전 거란의 제 1차 침입 당시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에서 고려는 강동 6주의 영유권을 인정받는 대신 여진을 정벌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즉 유종이 앙심을 품은 것이 아니라 조정의 명을 받기 전 고려 성종과 서희 대감이 강동 6주를 받은 조건에 대한 여진 정벌을 대신 나선 셈이다. 더욱이 조정의 명을 받기에는 이미 강조의 정변이 터지고서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현종 본인이 명을 내릴 수 있는 상황도 작용했다. 이후 요종이 여진족을 학살한 사건의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현종이 즉위하고 요에 사신을 파견하여 사실을 알린 것을 비롯하여 몇 차례의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요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 정벌의 군령을 내려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사신을 파견하여 목종 시해의 이유를 정식으로 물어왔다. 고려는 두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고 특히 9월에는 거란의 수도인 동경의 유수에게도 특사를 보냈으나 거란의 강경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2. 강조의 정변
고려의 6대왕 성종이 997년 후계자를 낳지 못한 체 죽자, 경종의 아들인 목종이 왕위에 올랐다. 목종이 왕위에 오른 나이는 고작 18살이었으므로, 경종의 3번째 부인인 천추태후 고려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경종의 3번째 비이다. 또한 성종의 여동생 중 한명이고, 7대 왕인 목종의 생모이다.
(天秋太后)가 섭정을 했다. 섭정을 시작한 천추태후는 외척세력을 나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김치양이다. 김치양은 고려 성종 때 천추태후와 정을 통하던 사이였다. 성종은 그를 처형시키고자 했으나, 멀리 장배를 보내는 것으로 끝마쳤다. 이렇게 헤어진 둘은 목종이 즉위하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김치양을 불러드린 것이다. 돌아온 김치양은 천추태후에게 합문통사사인 고려시대 관직중 하나로, 조회와 의례를 맡던 관서이다.
이라는 벼슬을 받고, 마음대로 정치를 시작했다. 게다가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이러한 상황에 목종이 후계자를 두지 않고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참에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했다. 유충정 고려시대 문신으로, 김치양이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했을 때 내응하고자 했으나, 이를 왕에게 고한 사람이다.
에게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 게다가 다음 후계자로 유력한 대량원군 왕순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어떠한 무리가 자신에게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그 곳에 독약을 넣은 것 같아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었더니, 참새와 까마귀가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즉, 자신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있으니 보호해달라는 뜻으로 밀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중추원부사 고려시대에 왕명 출납과 군사동원을 맡던 중앙 행정 부처이다.
채충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종묘사직을 대량원군 순에게 넘겨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대량원군은 삼각산의 신혈사에 있었다. 이때 목종은 합문사인 유행간 고려시대에 합문사인이 되어 왕 측에 있었던 사람이다.
은 대량원군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니, 이 사실을 알리지 말고 대량원군을 맞이하라고 명했다. 한편 강조는 목종의 궐내로 들어오라는 명을 받고 개경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강조는 왕명이 조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서경을 돌아간다. 하지만 이 소식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서경에서 강조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보낸 거짓 정보인 것이 더 유력하다. 서경으로 돌아온 강조는 이 후 아버지에게 또 다른 소식을 듣는다. 목종이 죽고 김치양세력이 개경을 휩쓸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강조는 다시 개경으로 갈 채비를 한다. 강조의 계획은 김치양의 세력을 제거한 후 후계자로 채택된 대량원군 왕순을 왕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다. 개경해보니 목종이 아직 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강조는 다시 서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미 그는 군사를 끌고 개경에 들어왔기에 왕명을 어긴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원래 계획했던 것을 진행하기 위해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 순을 왕위에 올린다. 사실 강조가 굳이 목종을 폐위시켰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현종이 이 일에 간섭한 것이다. 이 설에 대해서는 확실한 여부를 알 수 없지만, 강조는 결국 왕위를 폐위하고 새로운 고려의 왕으로 대량원군 왕순을 올렸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만 해도 그들은 이 사건이 거란의 2차 침입을 불러올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이 사건은 거란이 2차 침입을 할 때 내세운 명분이 된다.
3. 전쟁 과정
거란은 고려에서 일어난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한다. 강조의 정변은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 태후가 김치양과의 불륜으로 얻은 아들을 목종을 폐위시키고 올리려고 하자 이를 눈치 챈 강조가 서경에서 군사 약 5000여명을 데리고 와서 김치양을 죽이고 목종과 천추 태후를 귀양 보내고 그 후계자인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린 사건을 말한다. 정변 후 하공진이라는 사람이 거란의 1차 침입 때에 맺은 계약을 지킨다는 구실로 중앙의 허가 없이 여진족을 공격하나 되려 패배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의 동료 유종이 패한 것을 억울하게 여겨 고려에 왕을 만나러 온 여진족 추장과 수행원 95명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화가 난 여진은 거란에게 자신들이 당한 처사와 고려에서 일어난 정변을 알려 침략 구실을 만들어주고 거란(이후 요)의 왕인 성종은 강조가 일으킨 정변을 구실로 삼아서 약 40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시작한다. 요 성종은 자신이 직접 40만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는데 이전 침입과는 다르게 미리 침략을 알리고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을 했다. 이 때문에 또 다시 고려의 조정은 항복하자는 의견과 싸우자는 의견으로 갈리게 된다. 하지만 실권자인 강조가 싸우자는 의견을 내면서 강조 본인이 하공진 등과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 성종과 싸우러간다. 이때 거란은 흥화진을 공격하나 양규와의 수성전에서 패배하며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서 남진 하게 된다. 이때 요 성종이 후방을 염려해 20만을 남기고 가는데 20만이면 거란의 군사의 절반인 것을 미루어보아 훈련이 덜된 군사 혹은 과장일 확률이 높다. 이후 통주에서 요 성종과 강조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처음에 우세하던 강조가 방비를 허술하게 한 사이 요 성종에게 대패하면서 고려의 훌륭한 장군들과 정예병들을 대거 잃게 된다. 이중에선 강조도 포함되는데 포로로 잡힌 그는 결국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형 당한다. 이후 현종은 위험한 서경을 돕기 위해 지채문 1010년 중랑장(정 5품 무관직)에 임명되어 하공진과 유종과 함께 화주의 방비를 맡았다.
을 급파 하는데 서경 내에서는 이미 항복을 결정한 상황이었다. 서경에서는 지채문이 도착하기 전에 문을 잠그고 항복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이에 지채문의 부하가 서경 내부와 연락하여 문을 열지만 이미 항복 사절은 출발한 뒤였다. 지채문은 이를 막기 위해 출발한 사절을 향해 군사를 보내었고 잡힌 사절단을 죽인 후 문서를 불태웠다. 이러한 대처에 서경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지채문을 내쫒아 버렸다. 요 성종은 현종이 거짓으로 보내둔 항복 문서를 받고 진군을 멈췄다. 이후 요 성종은 항복 문서를 받아들여 서경의 관리를 뽑아 군사를 함께 보냈다. 그러나 서경에는 이미 고려의 주력부대가 서경에서 쫒겨난 지채문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방심하고 있던 요나라의 병사들이 도착하자 기습을 하였고 요나라 병사의 반은 죽이고 반은 포로로 잡는다. 요나라의 선발대 중 돌아간 사람이 없자 요 성종이 보낸 서경의 부관리는 이를 모르고 자신의 군사와 함께 서경으로 들어가려하나 앞서의 경우와 같이 궤멸 당한다. 이에 성종은 분노하며 자신의 군사들을 이끌고 서경 총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고려의 지원군이 도망치자 서경은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중간급 지휘관들이 활약하면서 서경을 다시 사수하였고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흥화진의 양규는 군사들과 백성들을 나누어 다른 성에 배치함으로써 거란을 몰아 넣기 시작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서경과 곽주를 뒤로 하고 남하하기 시작한다. 요나라가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고려 조정은 강감찬의 의견을 채택하여 더 싸우기 위해 피난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때 왕은 임진왜란과 비교했을 때 보다 더 심한 대접을 받게 된다. 호족의 병사들로 보이는 적이 공격을 해오자 싸우자고 의견을 말한 관료들과 남아있던 군졸들, 궁녀들까지도 도망친다. 하지만 고려는 남은 병사들을 수습하고 공격해오는 적들에 대항하다 이후 하공진과 합류하게 된다. 이렇게 왕이 피난길에서 고생을 할 때 거란은 개경을 함락시키고 불 태워버린다. 요나라의 추격을 염려한 하공진은 스스로 요나라와 화친을 맺는 척하여 시간을 벌었다. 하공진은 창화연에서 왕의 무리와 헤어졌다. 그는 왕을 배웅하고서 창화연에 들어가자마자 요나라의 군세와 만나게 된다. 왕과 방금 헤어진 하공진은 이에 당황치 않고 고려의 남쪽이 엄청나게 넓으며 왕은 이미 멀리 벗어났다고 속이고서 거란군에게 훗날 요 성종과 고려 왕과의 대면을 약속하였다. 또한 자신을 인질로 데려감으로 인해서 후퇴하라고 제시하였다. 북방의 남은 고려군이 퇴로를 차단해 위험함을 안 성종은 마지 못하는 척 하면서 군사를 돌리나 양규를 비롯한 군사들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그나마 잡았던 포로들도 3만명 가량 잃게 된다. 하지만 양규는 포로를 데려가다가 요의 주력 부대와 대면하게 되었다. 고려의 양규를 비롯한 모든 장수들과 남은 병사들은 앞서 구출한 포로의 후퇴시간을 벌며 장렬히 전멸하고 만다. 이는 마치 테르모필레 전투가 연상될 정도였다.
4. 전쟁 이후 상황
거란이 철수한 이후 고려에서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어 회군한 것에 감사를 표하고 동지사, 생신사를 파견하여 양국 간의 화평 유지에 노력하였다. 거란군은 명목상 고려 왕의 친조를 약속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이익을 얻진 못하였으나 고려와 송의 연합을 저지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고려는 거란에 대한 친조를 다시 한 번 약속하였으나, 끝내 친조하지는 않았다. 고려는 수도가 함락되고 서북 지방이 초토화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거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많은 병력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장수를 뽑을 때 조금이라도 글만 읽으면 특채로 뽑아야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또한 거란과 고려 사이에서 수많은 여진 난민이 발생하였다. 고려는 이들을 내지에 집단, 이주시키고 수공업 등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기록을 보면 직역 상 천민으로 된 것 같다.
Ⅲ. 결론
이후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비밀리에 교류를 하였으며, 특히 1010년 송에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지만 송은 고려가 조공을 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요청을 거부하였다. 원래 고려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군사적 예봉을 완화 시키기 위해 방편으로 ‘거란의 철수’에 대응하여 ‘국왕의 친조’라는 강화 조건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요구는 이루어지기 힘든 요구였고, 결국 3차 침입의 구실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규모 전쟁은 불을 보듯이 뻔해졌고, 고려는 다양한 방비를 시작하게 된다. 산성을 건설하거나 어마어마한 징병을 감행했고, 망가진 개경의 방어벽을 재건축을 하였다. 또한 중앙 군대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