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
1840년 아편전쟁과 1857년의 2차 아편전쟁의 패배 그리고 1851년에서 64년까지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가 붕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구호 아래 서양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고 합니다. 1870년대까지는 ‘동치중흥’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안정과 발전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사이 일본은 보신전쟁을 통해 막부체제가 문을 닫고 메이지 유신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일본인들은 대포와 소총 앞에서 사무라이의 칼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실감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개혁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반발과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해외 침략을 벌이는 일이 최선이라 여겼습니다. 이는 1872년 징병제 실시, 1874년 모란사 출병, 1875년 운요호 사건 등으로 착착 현실화 되었지요.
이런 과정에서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일본은 조선에 관한한 청이 일본보다 앞서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다만 천진조약을 통해 어느 한 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한다는 정도의 성과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청의 이홍장은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하고 독일에서 7천톤 급의 초대형 장갑군함인 정원, 진원, 제원을 구입하였습니다. 다시 1887년에는 치원, 정원, 경원, 내원을 더 구입하여 일본해군을 압도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해군의 전함은 최대 톤수가 3천톤에 불과하였습니다.
한편 러시아가 조선의 함경도 영흥을 탈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855년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요새를 구축합니다. 청은 이러한 영국의 행동에 동의하자 조선은 청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청은 이러한 의심을 해소하고자 대원군을 조선에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호송책임자라며 원세계도 보냅니다. 그가 내정에 하나하나 간섭하자 조선은 청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지게 되고 이제 믿을 수 있는 나라는 러시아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우호관계를 맺어온 영국이 청과 손을 잡고 조선이 러시아로 돌아설 조짐이 보이자 급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 건설 중인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이 되면 러시아가 멀리까지 손을 뻗치게 되므로 그 이전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해 놔야 한다는 강경론이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각국이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사이 조선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한번에 바꿔버릴만한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입니다.
1894년 5월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넘어갔다는 급보를 받은 조선 정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예병을 보냈지만 농민군에게 대패하자 성급하게 청나라에게 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결정이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을 지금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청나라의 북양함대에서 약 1500 명의 군사가 아산에 도착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물포항에 4천에 달하는 군사가 파병되었습니다. 경악한 조선과 청나라가 항의했으나 일본은 천진조약에 따르면 분란이 끝나야 철수할 수 있는데 동학란은 조선이 부패하고 민생을 외면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므로 조선의 체제를 개혁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철수 할 수 없다는 억지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군대를 한양으로 이동시키고 군대를 재편하는 등 전쟁준비를 합니다.
일본의 이러한 노골적인 도발에 격앙된 청 정부의 관료들은 일본에 본때를 보여주자고 하였으나 정작 최고실력자인 서태후와 이홍장은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청의 군사력이 얼마나 속빈 강정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서태후가 말년을 보낼 별장인 이화원을 만들기 위해 북양함대에 배정된 예산을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북양함대에 배정된 1년 예산이 150만냥인데 이화원 낙성식에 들어간 비용만 2천만냥이라고 하니 함대 전력이 어떨지는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홍장이 군비 비축분을 점검해 보니 장원호와 진원호에 적재된 포탄이 단 3발씩 뿐이라 아연실색했다고 합니다.
풍도해전
1894년 7월23일 일본은 경복궁을 침략하였습니다. 사실상의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홍장은 전쟁을 피해보려고 러시아에 중재를 요청하기도 하고 조선을 남북 반씩 나눠 갖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 영국은 일본을 지원하게 되고 결국 경복궁 점녕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홍장은 장탄식을 하고 아산의 청군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하고 만주에 있는 군대에게는 평양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일본을 위 아래에서 협공할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아산에 있는 청군은 자체 병력으로는 협공전을 치르기가 어려워 본국에 2차 증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청나라의 고승호가 병력과 보급품을 싣고 북양함대의 조강호의 호위를 받으며 출항했습니다. 아산에 있던 제원호와 광을호가 마중나와 함께 아산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순찰 중이던 일본의 순양함 3척과 마주쳤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포격을 시작했고 약 한시간만에 광을호는 대파되었고 조강호는 나포되었으며 제원호는 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승호였습니다. 단지 수송선에 불과했던 고승호의 국적이 청이 아닌 영국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순양함 나니와 호의 함장이 바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전멸시킨 도고 헤이하치로 였습니다. 그는 고승호는 건드리지 않을테니 일본까지 다라오라고 요구했고 고승호의 선장은 이를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도고는 포격을 명령했고 고승호는 침몰되었습니다. 이때 배에 타고 있던 유럽인들은 물에 뛰어 들었고 청나라 군사들은 배가 침몰되어 가는 중에도 악에 바쳐 총격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불리우는 풍도해전입니다.
성환전투
풍도해전 직후 한양에서 일본군은 남하하였고 아산에 있던 청군은 천안시 서북구에 있는 성환에 진을 쳤습니다. 저녁 나절에 성환에 도착한 일본군은 청군의 허를 찌르기로 결정하여 야습을 감행합니다. 이것이 성환전투로 일본이 승리하여 아산까지 장악을 합니다. 청군은 아산을 버리고 평양으로 달아나 버림으로써 남북으로 일본을 압박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8월1일 일본은 청나라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합니다.
평양전투
그 후 9월까지 일본은 요동반도와 산둥반도 사이에 있는 발해만에서 청의 북얌함대를 견제하는 한편 조선과 동맹조약을 맺어 조선을 전쟁으로 끌어들이고 본국에서 계속 병력을 조선으로 수송했습니다. 일본 본토에 병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으니 일본도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에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이 열심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청나라는 별다른 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싸우면 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전쟁보다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게다가 파벌싸움이 계속되었으며 아산에서 패배한 장수를 허위보고로 인해 병력을 잃지 않고 보전했다고 하여 총사령관에 앉히는 우를 범합니다. 1만5천에 해당하는 평양주둔 청나라 군사들을 알력과 분쟁으로 단합이 안되는 상황이 이어지니 한양으로 모이는 일본군을 치려 군대를 보내기는 커녕 평양수비도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9월초 일본은 평양 공격을 명합니다. 청나라도 완전히 놀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평양성을 철옹성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9월 15일 드디어 양국의 군대가 마주하게 되니 임진왜란 이후 약 302년 만에 일입니다. 전투는 성환전투와 같이 야간이 기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양쪽이 치열하게 싸워 청군의 희생자는 약 2천명, 일본군은 162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가장 피해가 큰 쪽은 평양에 있던 강제로 동원되어 있던 조선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전투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자 청군은 만주로 퇴각하였으며 일본군은 재정비를 마치고 그들을 쫓아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이로서 조선 땅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은 사실상 끝나게 됩니다.
황해해전
육지에서는 일본이 압승을 하였으나 아직 청나라에게는 북양함대가 남아 있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청의 북양함대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북양함대는 전투함 12척에 철갑함은 정원, 진원을 비롯한 5척이었으며 일본의 함대는 전투함이 12척으로 같았으나 철갑함은 1척에 불과하였습니다. 대포의 경우 청은 21문인데 비해 일본은 겨우 11문이었습니다. 다만 속사포가 67문이나 되어 6문뿐인 청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균속도에서는 일본 16노트로 14노트인 청보다 앞섰습니다. 즉 북양함대가 화력에서는 앞서고 일본의 연합함대는 속도에서 앞선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북양함대와 연합함대의 만남은 치밀한 작전에 따라 벌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각자의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려는 도중 압록강 앞바다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전투는 일본의 연합한대가 북양함대를 오른쪽을 빠르게 빙빙 돌면서 속사포를 퍼부어 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