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Introduction
최근에 “국화의 칼”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당시, 저자가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인에 대해 이해하고자 저술한 책인데, 이 책을 통해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일본인들의 문화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에세이는 태평양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된 진주만 공습의 배경과 그 내용에 대해 소개하고, 뉴기니 섬에서의 이야기, 그리고 “국화의 칼”의 줄거리에 대해 서술하고, 태평양 전쟁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II. Pacific War
A. Pacific war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에 의해 발발하였으며 1945년 9월 2일에 도쿄만의 USS Missouri (BB-63)에서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으로 끝난 전쟁이다.
B. Defining Pacific War
2차 대전이 유럽을 중심으로 한 1939 년 9월 1일부터 벌어진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한 전쟁이라면 1941년 12월 8일(하와이 현지 시간으로 12월 7일)에 일본에 의해 벌어진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과 중첩되어 나타난 또 다른 전쟁이다. 주로 ‘태평양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중일전쟁, 미일 전쟁, 대동아 전쟁, 태평양전쟁, 15년 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등으로 명명되어왔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자는 견해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의 특징과 태평양으로의 전쟁 확대를 모두 설명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이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중일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보게 하는 특징을 가진다.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명칭을 확대할 경우 만주사변이후 중국에서 벌어진 전쟁의 연속성속에서 전쟁을 다룰 수 있기에, 이 에세이에서의 태평양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과 중첩되어 벌어진 독립적인 전쟁으로 정의한다.
C. Major wars of Pacific War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1942년 1월 31일 싱가포르 전투 (~ 2월 15일)
1942년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 ( ~ 6월 7일)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전투 (~ 1943년 2월 9일)
1944년 6월 11일 사이판 전투(~7월 9일)
1945년 2월 19일 이오 섬 전투 (~3월 26일)
1945년 3월 10일 미국의 일본 도쿄 대공습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전투 (~6월 23일)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1945년 9월 2일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III. Battle of Pearl Harbor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킨 이후, 1939년 9월, 유럽에서 독일은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후 1년여 기간 동안 북유럽, 서유럽, 남유럽의 10여 개 국가를 점령했으며, 총부리를 소련에 겨눔으로써 세계대전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중국 전장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의 많은 영토를 점령했다.
1940년 7월, 일본의 고노에 내각은 ‘기본국책요강’과 ‘세계 정세의 추이에 따른 시국처리요강’을 제정해 극동 및 태평양 일대의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9월 23일 일본군은 인도차이나 북부 점령을 시작으로 남쪽 지역 공략에 나섰고, 27일 히틀러가 일본을 끌어들여 ‘독일, 이탈리아, 일본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했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이 대동아시아에서 구축하려는 새로운 질서의 지도적 지위를 승인하며 이를 존중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일본의 아시아 침략 욕심은 간절해졌고, 중국 등의 아시아에서의 세력 범위를 넓히려는 일본의 야심은 미국과의 갈등을 격화했고, 미국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일보 조치를 취했다. 1940년 9월, 미국 국무장관은 일본에 베트남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일본은 전쟁 중 무기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자원을 빼앗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나, 중국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아서 밑의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쪽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을 강행해야 했기에 이를 무시했고, 미국과의 갈등은 심화되고 있었다. 미국은 이 갈등을 일본과 평화회담을 통해 풀어보려고 하여 1941년 3월부터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 일본 대사와 협상을 벌였다. 이때 미국은 중국 동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서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을 대표해 미국과 일본 간의 협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미국과 일본이 서로 타협해 중국을 희생시키는 것은 반공반소 국면을 조성하는 동방 뮌헨의 새로운 음모이며, 반드시 이를 폭로해 저지해야 한다.” 위와 같은 중국의 반대로 뮌헨 음모는 실패로 끝났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내각과 최고사령부 내에는 정세에 따라 ‘남진’과 ‘북진’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장관은 ‘선 북진, 후 남진’을, 도조 히데키 육군 대신은 ‘선 남진, 후 북진’을 주장했다. 해군은 남진을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동남아의 풍부한 자원을 탈취하기가 쉬워지며, 미국과 결전을 치를 태평양에서의 군사기지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41년 7월 2일, 일본 천황이 소집한 어전회의에서 ‘제국국책요강’을 통과시켜 ‘남진’을 위주로 하는 ‘남진’ 정책이 확정되었다.
일본은 남방 진출 계획을 감추기 위해 사방으로 병력을 이동 배치 하며, 동북에서는 ‘관동군 특별 대연습’을 실시해 미국을 혼란스럽게 했다. 동시에 뒤에서는 비밀리에 남진 준비를 했고, 1941년 7월 19일, 일본군 최고사령부는 중국 하이난 섬에서 대기하던 제25군 사령관 이이다 쇼지로 중장에게 인도차이나 전체를 점령하라고 명령해 미국의 태평양 속지인 필리핀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이에 8월 28일, 웰스 미국 부국무장관은 정부를 대표해 일본군에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미국은 동시에 필리핀에 극동윤군총사령부를 세우고,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일본의 동남아 공격에 대비했다.
10월 13일,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사퇴하고, 10월 17일 도조 히데로키가 정권을 잡으며 외무 대신, 육군 대신, 내무 대신을 겸임했다. 히데로키는 전쟁 준비를 위해 해군과 육군의 병력을 강화했고, 일본의 군사 수뇌들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가 동남아에 두고 있는 주요 근거지를 제거하고, 태평양에서의 전면 공세를 취하기 위한 남진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 노무라 대사를 미국과의 ‘회담’에 나서도록 하기도 하였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남진 연합함대 사령관은 일본 군사 수뇌들에게 아시아를 독점하고 남쪽의 공격에 집중하려면 미국의 태평양 하와이에 있는 군사기지인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1월 3일, 야마모토의 진주만 습격 해군 작전 계획은 승인되었고, 이 계획은 공중 기동 습격으로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 및 섬 내의 공군 비행장을 집중 타격하는 내용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항공모함 6척을 비롯한 전함 30여 척으로 구성된 기동 돌격특별함대를 구성해 개전 10여 일 전에 일본 북쪽에서 은밀히 출발하도록 하고, 기습 당일 일출 전, 오아후 섬 북쪽 2백 해리 되는 해상에 도착해 공격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잠수정 27척을 주력으로 한 3개의 선견 함대를 편성해 함께 공격하고, 특종 잠수정 5척으로 1개 특종공격함대를 편성해 미국 함대 정찰과 공격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기습에 성공하기 위해 일본군 최고사령부는 여러 차례 모형과 그림을 이용해 공격 작전을 점검하고, 11월에는 사이키 만에서 전함을 목표로 두 차례 공격 예행연습을 진행했다. 또한 일본군은 미국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외지지만 진주만과 지형이 흡사한 사쿠라지마 섬에서 실전 훈련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의 여러 차례 연습과 실전 훈련을 통해 기습이 성공하도록 했다. 이 시기에는 진주만에서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간첩도 파견했는데, 그 수는 약 2백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부 군관들을 여행객 또는 선원으로 위장해 예정 시습 항로 및 지점에 대해 정찰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활동으로 일본은 오아후 섬의 미군 방어시설, 비행기와 함정의 종류, 정박 위치, 미군의 휴가일 등에 대해 모두 꿰뚫고 있었다.
11월 중순, 일본 최고사령부 해군부는 ‘대해령 제1호’를 발령하고, 남진연합함대에 모든 전투 준비를 마친 후 지정된 지점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육군부도 ‘대군령 제556호’를 하달하고 남방방면구의 전투 서열 진입을 명령했다. 12월 2일, 일본의 육해군 군부는 회의를 열고 진주만 기습 일자를 12월 8일(하와이 기준 12월 7일)로 결정했다. 이 날은 미군의 주말 휴일로 태평양함대의 함정 대부분이 항구에 정박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2일 오후 5시, 마쓰야마 겐나 일본 육군 참모장과 나가노 오사미 해군 군령부장관은 천황의 동의를 얻은 후, ‘대해령 제12호’ 명령을 하달했다. 30분 뒤, 야마모토 사령관은 나구모 특별함대에 “신고산에 올라가라 1208”이란는 비밀 무전을 발신했고, 이는 “개전 일자는 12월 8일 새벽 0시(도쿄 시간)로 예정 계획대로 진행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각종 군사 행동에 대해 일찍부터 눈치채고 있었으며 정보기관도 일본 암호의 비밀을 파악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 암호를 잘못 해석해, 미국과 정말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내렸다. 더욱이, 일본군이 감히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기에, 미국은 진주만 방어에 소홀한 상태였다.
일본군 연합함대는 12일 간의 항해 끝에 12월 7일(하와이 시간) 0시, 계획대로 진주만 북쪽으로 230해리 떨어진 해상에 도착했다. 곧이어 비행기 4백대가 항공모함에서 발진해 진주만으로 향했고, 각 함정도 전투 태세를 취했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3시 35분, 콘도르호 미국 소해정이 진주만 서남 부표 부근에서 수면에 잠수정의 잠망경이 드러난 것을 발견하고, 즉시 섬광등 신호로 정찰 구축함 워드호에 통지했다. 3시간 뒤, 워드호의 조타수가 잠수정의 지휘참이 수면에 드러난 것을 발견했다. 이때, PBY 수상정찰기가 상공에서 적의 잠수정을 발견하고 조명탄을 투하해 목표물을 확인하도록 했다. 워드호는 즉시 목표물을 향해 포탄 2개를 발사해 일본군 미니 잠수정 하나를 명중시켰고, 적의 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때, 미국 주하와이 해군 당국은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보를 무시했다. 오전 7시에도 오파나 레이더 기지로부터 육군 기지 당직 군관은 보고를 받았으나, 당직 군관은 자국의 비행기가 날아오는 것으로 여겨 무시했다. 7시 55분, 후치다 미쓰오가 이끄는 제1파 공격대의 비행기 183대가 진주만 상공에 이르렀다. 진주만의 미군은 대규모의 일본군 비행기가 상공에 날아온 것을 연습으로 오인했는데, 순식간에 급강하한 일본 폭격기들은 진주만 기지의 각 비행장을 폭격하고 기관총 등을 쏘았다. 몇 분 동안 카네오헤와 포드 섬 내 미 해군 비행장, 통가타푸 해병대 비행장 등은 전부 폭격으로 인해 마비 상태에 빠졌고, 대부분의 비행기가 파괴됐다. 7시 58분, 일본군의 두 번째 돌격 비행기 무리가 또 다시 진주만 상공에 도착했고, 이번 표적은 항만 및 주변 항로에 정박해 있는 미군 태평양 함대 및 함정 98척이었다. 일본군 뇌격기는 사방에서 저공비행으로 어뢰를 발사했고, 미군 태평양함대 애리조나호 전함은 몇 동강이 나버렸고, 펜실베니아호를 제외한 다른 전함 여러 척이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오클라마호는 전복됐고, 웨스트버지니아호와 캘리포니아호는 그 자리에서 침몰했다. 8시, 미군 당국이 첫 번째 경보를 울려 이 상황이 연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렸다. 8시 25분, 제2파 공격대의 비행기 168대가 또 다시 진주만으로 날아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고, 미국의 반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일본군은 진주만을 기습한 두 차례 공격에서 총 95분ㄴ 동안 미군 주요 함선 18척을 격침시키거나 손상을 입혔고, 미군 비행기 3백여 대를 파손시켰으며, 미군 4천5백여 명을 사상하였다. 반면, 일본은 비행기 28대와 잠수정 6척을 잃는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의 성공으로 최고사령부 장관들은 크게 기뻐하며 축배를 들었고, 병사들 또한 늦은 밤까지 즐겼다. 진주만 공습 이후, 루스벨트는 국회 연설에서 1941년 12월 7일을 “영원히 잊지 못한 치욕의 날”이라 칭하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이 전투에 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은 발발했다.
IV. Japan’s Army in New Geinea
모르즈비 상륙작전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부나에 상륙한 호리이 소장에게 1만 4000명을 이끌고 뉴기니를 횡단해 모르즈비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일본군은 죽음의 정글이라 불리우는 뉴기니 섬으로 향하게 된다.
일본군은 오웬 스탠리 산맥과 뉴기니 정글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는 길은 원주민도 다니지 않은 험한 길이 있고, 그 길은 심지어 끊겨 있기가 대부분이었고, 미끄러지면 진흙 위로 미끄러지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하기가 다반사였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한 달 만에 일본군은 정상 부근으로 진출했다. 하지만, 식량은 다 떨어졌고, 뉴기니의 정글에는 정말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사령부는 부대에게 복귀 명령을 내렸다. 식량마저 떨어진 상태에서 일본군은 이 흉포한 길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고, 철수하는 무렵 일본군에게 마지막 복병인 우기가 찾아왔다. 이 빗속에서 일본군은 중장비를 버리고, 중상자는 사살하고 경상자는 둘러 맨 채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다. 하지만 밤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전우는 사살했고, 굶주린 병사들은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기도 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식량이 없고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모두 사살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사살되고 거의 전멸 상태로 부대는 복귀했다고 한다.
V. 국화와 칼
위와 같이 일본인의 전투 및 문화는 당시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적의 성질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서양 문화 전통에 속하지 않는 무장하고 훈련된 국민을 마주하는 등 군사적이 아닌 문화적으로써 일본을 이해하는게 필요했었다.
책에서, 전쟁을 통해 그 나라가 가지는 정신과 세계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본에는 전 세계가 일본을 의식해 보고 있다는 무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부상을 당하거나 실패한 자를 도와주는 자비로운 태도는 수치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면서 죽는 것을 명예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또한, 천황에 대해 매우 특별하게 숭배하는데, 일본의 천황은 일본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나, 일본을 유지하게 하는 정신적인 깃발이며 태양으로써 전적인 신뢰와 명예로운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일본인은 계층적인 관점을 가지고, hierarchy 구조의 위계질서를 강조한다. 그들은 사회적 위계질서를 준수하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균형과 책임을 중시하는데, 이는 각자의 신분계층에서 질서가 지켜지면서도, 각자의 신분 계층이 가지게 되는 특권과 의무가 동시에 중요하게 지켜지고 강조되는 형식이다. 각자의 개성보다는 전체라는 틀을 항한 충성도가 매우 강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천황의 위치도 보장되고 계급간의 투쟁이 없다는 것이다.
‘온’이라는 가치와 할복 등의 일본인의 세계관과 사상, 그리고 삶의 양식은 “어떻게 자라느냐”에 달려있다. 일본의 아이들은 이중적인 훈련을 통해 급격하게 달라지는 삶의 양상에 따라 대처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인데, 여기에 일본인의 ‘온’이 담겨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이중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욕망의 억제, 용병 훈련,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공포, 수치, 질투, 그리고 복수심의 훈련,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별적인 태도 훈련, 이중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 수 있는 불연속성의 인지 등이 있다.
즉, 일본인은 수치, 공포 등과 온의 사상에 맞추어서 “자신의 알맞은 자리를 받아들이는” 극단적인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주로, 패전을 한 국가의 국민의 상황은 비참하다. 패배감과 방황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수치’를 중요시 하는 일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패배를 인정했고,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가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미국도 패전국인 일본의 자율을 최대한 허용했으며, 일본인은 세계가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서 존경받는 나라가 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패전국인 일본이 회복되기 위한 제안을 해주고 있다.
VI. Conclusion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뉴기니 섬에서 일어난 일 등 태평양 전쟁 중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일본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당황스럽기도 할 것 같다. 실제로 나도 “국화의 칼”을 읽기 전에 일본의 사상 등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기도 했었는데, 전쟁 중에 미국은 어떤 의구심이 있었을지 감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혹시나 태평양 전쟁을 공부한다면, 그 전에 “국화의 칼”을 통해 당시 일본인들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이해를 한 뒤 시작해보기를 권하며 마무리한다.
VII. 參考文獻
아시아-태평양전쟁원인에 관한 연구: 상대적약국의 대강국 예방전쟁 사례연구_신희섭
국화와 칼_루스 베네딕트
일본제국 패망사_존 톨런드
일본의 굴레_테가트 머피R
그림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_ 천팅이 _ 한국학술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