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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 거란 2차 전쟁(김현태) 역사, 철학



『고려·거란 2차 전쟁』




Ernst Schule Internationale

學 年 : 11學年

이 름 : 김현태,

2018. 9. 16

『고려·거란 2차 전쟁』


지 도 교 사 : 유 경 선


이 Essay를 과제물로 제출함


2018年 9月 16日


Ernst Schule Internationale



목   차



Ⅰ강조의 정변……………………………………………………………………………………··
1
   1. 고려 초기 왕실 계보………………………………………………………………………···
1
   2. 강조의 정변………………………………………………………………………………······
2


Ⅱ 거란의 2차 침입…………………………………………………………………………·…
3
   1. 양규의 홍화진 전투…………………………………………………………………………··
3
   2. 강조의 참패………………………………………………………………………………······
3
   3. 서경 공방과 현종의 피난길…………………………………………………………………
4
   4. 거란의 철군……………………………………………………………………………………
5
 


 




 

 




Ⅰ 강조의 정변

거란이 서희와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는 대신에 고려와의 국교를 얻어냈지만 이후 고려와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약속을 어긴 고려를 다시 침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거란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 시해하고 대량 원군을 왕위로 옹립한다. 거란의 성종은 이를 트집 잡아 강조의 죄를 묻고 사건 수습을 해야겠다며 직접 군사를 파견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억지스러운 명분이었으며 속뜻은 송나라와의 관계를 견제함과 동시에 거란과의 관계를 재차 확인하고자 함과 강동 6주를 되찾아 오겠다는 것이었다.

1. 고려 초기 왕실 계보

태조 왕건은 공식적으로만 29명의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다 왕권강화를 위해 많은 호족의 여인들과 혼인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집안이 한미한 여인들과도 여럿 혼인을 맺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만이 이유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 그 중 1째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해 둘째 부인 장화왕후와의 사이에 왕무(혜종)을 낳는다. 혜종은 집안이 뛰어나지 못했기에 큰 힘을 가지지 못했고, 재위 2년 만에 암살 시도를 2번이나 겪는 등 문, 무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혜종은 자객들을 2차례 직접 제압한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들을 두각시키지 않았다. 만일 취조하여 배후자를 알아낸다면 그 호족들이 일으킬 반란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스트레스로 병에 걸려 사망한다. 이에 신명왕후 유씨의 아들 왕요(정종)이 왕위를 잇는다. 그런데 정종도 동생 왕소(광종)의 왕위를 노리는 것 등 많은 고민 속에서 병에 걸려 재위 4년 만에 사망한다. 광종은 대목왕후 황보씨와의 근친혼으로 경종을 낳는다. 경종 또한 후에 대종으로 추존되는 왕옥의 두 딸 헌애왕후(천추태후)와 헌정왕후와 근친혼을 맺어 헌애왕후와의 사이에는 목종을 낳고 헌정왕후와의 사이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 목종이 너무 어렸기에 대종 옥의 아들 성종이 왕위로 오르고, 그 다음에 목종이 어린나이에 재위한다. 신라의 왕실세력이었던 신성왕후 경주 김씨의 아들 안종 옥과 경종의 부인 헌정왕후 사이에 불륜관계가 있었다. 헌정왕후는 아들까지 임신하게 되는데 이 아이가 후에 현종이 된다. 둘의 사통을 안 헌정왕후의 동생 성종이 안종 옥을 유배보내고 헌정왕후는 집에서 근신하게 하였다. 안종 옥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고 헌정왕후도 현종을 낳으면서 사망하게 된다.

2. 강조의 정변
현종은 유배당한 안종 옥과 같이 지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성종이 현종을 다시 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성종이 죽고 목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천추태후의 섭정이 시작되었고, 천추태후는 김치양이라는 자와 사통을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래서 정통 왕가혈통인 현종을 절로 내쫓아 버리게 된다. 이 것도 불안한 나머지 천추태후는 그를 독살하려고까지 한다. 어느 날은 궁녀가 찾아오는 데, 현종은 이미 땅굴을 파서 그 속에서 숨어있었다. 궁녀가 그의 행방을 묻자 승려들은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니, 궁녀는 날이 새도록 그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현종이 한나절을 땅 속에 쥐 죽은 듯이 숨어있던 것이다. 그리고 궁녀가 남기고 간 음식 보따리를 수상히 여겨 땅에 뿌리니 새들이 그것을 먹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처럼 현종은 끝없는 불안감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병에 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진 목종은 천추태우와 김치양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서북면 도순검부사로 있던 강조 고려는 북쪽의 중국, 거란, 여진을 경계하기 위해 북계(서북면)에 많은 군사력을 갖고 있었기에 목종은 서북면의 사령관급이었던 강조를 불러들인다.
를 궁궐로 들어와 그를 호위할 것을 명령하였다. 강조가 개경으로 가는 도중 최창회와 여러 거짓 소문에 의해 발걸음을 돌려 세우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목종이 이미 사망했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강조의 아버지는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지팡이 속에 서신을 넣어두고 강조에게 전해주었다. 편지 내용 역시 목종이 세상을 떠났으니 어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어지러운 개경을 진정시키라는 것이었다. 강조가 이말을 듣고 이현운과 함께 5000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도착하니 목종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왕의 명령없이 군사를 일으킨 반란죄를 뒤집어쓰게 생긴 강조는 어ᄍᅠᆯ 수 없이 무능력한 왕 목종을 폐위시키고 목종은 폐위당하고 유배가는 길에 강조의 명으로 시해당한 후 자살로 가장된다.
, 김치양 부자 등 7인을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근친 30인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현종을 왕위에 옹립시키는데 이것을 강조의 정변(1009)이라고 부른다.
Ⅱ 거란의 2차 침입

송나라와의 관계는 전연의 맹을 맺음으로 어느정도 정리된 거란은 아직도 고려가 자신들에게 거만하고 불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한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 것은 명분삼아 고려에 재차 침입하게 된다.

1. 양규의 홍화진 전투
1010년, 성종이 직접 40만 군대를 데리고 고려의 홍화진에서 첫 전투가 터진다. 양규의 군대는 굳건히 성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거란의 군사 또한 지겹게 달라붙지 않고 불과 몇 일 만에 성을 함락하는 것을 포기했다. 거란의 독특한 전쟁 방식이 드러나는 전투였다. 한 곳 한 곳 함락시켜서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은 너무나 일반적인 전쟁 방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뒤에서 적이 올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거란은 새로운 방식으로 전쟁을 하였는데, 일부의 군사를 성 근처에 매복시키거나 자리잡아 성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군대가 진군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 고려군은 성안에 꼼짝 못하기 때문에 뒤에서 공격받아 쫓길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최소한의 소수 병력만 남겨두지만 홍화진은 큰 요새 중 하나이기도 하고 거란의 본거지였던 내원성 근처이기도 하여 절반의 병력인 20만을 홍화진에 주둔시켰고, 나머지 20만 군대는 진격을 이어나갔다.

2. 강조의 참패




홍화진에서 남하하는 길은 단 두가지 뿐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용주, 철주, 통주, 곽주를 지나 서경에 이르는 길과, 내륙쪽으로 귀주, 정주, 안주를 통하는 길이 있었다. 거란은 해안길을 택했고, 별동대를 만들어 귀주 쪽으로도 군사를 보냈다. 이 때 강조가 거의 전병력을 동원하여 통주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최사위가 귀주의 성을 맡았다. 귀주성 앞에서 야전을 펼치던 최사위는 거란에게 패했고 최사위의 군대는 거란이 해안선 쪽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원성으로 진격하다 귀주성 앞에서 거란을 만나 패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통주에서 강조도 패했다. 기록에 따르면 강조는 군영을 세 개로 나누어 설치했다. 하나는 세 개의 물길이 만나는 곳으로 사진 속 강조본대로 추정되고, 하나는 산속, 나머지 하나는 성 앞에 설치해 두었다. 동림성이 주 요새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거란군 야율분노와 야율적노가 이끄는 거란군.
은 동림성 동쪽의 거대한 산들 때문에 아래쪽으로 돌아서 북상했어야 했다. 이 때 청강을 도강하였을지 아니었을지는 기록에 없지만 강조의 군영 배치상 도강이 유리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더군다나 전투 당시 겨울이어서 강은 얼어붙어있었고, 기동성에만 약간의 타격을 줬을 것이다. 첫 날 강조는 거란의 군사를 쉽게 이겨버렸다 일렬의 검차로 강조는 처음에 거란을 기선제압하게 된다. 하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거란은 곧바로 수레가 방향을 트는 데 취약하다는 점을 공략해 검차마저 무력화시켜버린다.
. 하지만 이에 방심했는지 그 다음부터 거란의 기동성을 이용한 포위에 어찌 할 바를 몰랐고 결국 참패를 당하며 후퇴만하다 학살당했다. 거란의 싸움방식은 원래부터 소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치고 빠지다가 허점을 노리는 것인데, 강조는 소규모 병력으로 미루어 보아 거란을 얕보았던 것 같다. 거란군은 통주의 본거지였던 동림성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여 강조와 군대는 동쪽으로 도망쳐야했다. 결국 강조와 이현운은 성종에게 잡혀 간다. 성종은 강조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하지만 고문속에서도 강조는 고려의 장군으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아 처형당하지만, 이현운은 목숨 앞에서 거란에 넘어가게 된다. 후퇴길에 완항령이라는 고개에서 매복하고 있던 김훈 장군을 비롯한 여러 고려 장군들과 군사들이 거란을 막아내 주어 고려군은 전멸을 면할 수 있었다.
3. 서경 공방과 현종의 피난길
신기하게도 거란에게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중요한 요새는 단 하나도 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거란이 청천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그래도 근거지 하나는 있어야 된다고 판단하여 곽주성을 점령하기로 하고, 점령하는 데 성공을 한다. 이어 서경에 다 이르니 고려 조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서경으로 탁사정에게 군사를 주어 서경으로 파견한다. 서경에서 화친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당시 지채문이라는 주전파 장군이 모두 숙청하였고, 1차 때 안융진에서 큰 공을 세웠던 대도수도 서경에 합세했다. 탁사정은 대도수에게 이러한 제안을 한다. 대도수 휘하의 군대가 거란의 이목을 끌고 있으면, 자신들이 빈 본거지를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대도수는 흔쾌히 수락하고 작전대로 행하는데 곧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탁사정과 다른 병력들이 대도수가 이목을 끌 동안 도망쳐 버린 것이다. 개경으로 도망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부장급 장군들이 성문을 굳게 닫아 서경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런데 더욱 기적적으로 양규가 홍화진 주변을 지키던 거란군들을 뚫고 나와 군사를 이끌고 곽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이로써 성종과 거란군사들은 근거지 하나 업이 갈 곳을 잃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역전된 상황속에서 성종은 서경을 그냥 지나쳐서 개경으로 들어가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고자 한다. 현종도 항복할 마음을 가졌지만 강감찬 장군의 만류로 나주까지 피난한 후 조금 더 버텨보기로 결정한다. 이로써 현종의 험난한 피난길이 시작된다. 고려는 조선 때와는 매우 달라서 성밖을 나선 왕이 대우를 받기는 어려웠다. 모두 도적떼처럼 몰려서 왕이 가진 금품들을 약탈할 생각으로 덤벼들기 바빴다. 이 때 지채문이라는 장군이 현종을 끝까지 보좌하기로 하였고, 중간에 하공진이라는 호족도 같이 보좌하게 된다. 그는 사실 여진족을 정벌하려다가 실패한 죄로 유배당해 현종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 같았지만, 충신으로서 현종을 받들기로 한다. 현종이 나주에 이르러 안정을 찾고, 하공진은 성종에게 찾아가 화친을 제의한다. 유리한 조건을 얻은 성종은 철군할 것을 약속하고 하공진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던진다. 하공진 역시 강조처럼 끝까지 거부하다가 처형당하는 충신으로 남는다. 끝까지 왕을 보좌한 지채문, 충신으로서 생을 마감한 하공진 등 많은 유능한 장군들의 도움으로 현종은 무사히 개경으로 복귀한다.

4, 거란 철군
거란은 철군하는 길이 더욱 더 험난했다. 오랜 원정에 근거지 하나 확보하지 못했으니 돌아가는 길에 고려군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더군다나 왕가의 포로 하나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질로 삼을 것도 없었다. 김숙홍 장군이 귀주에 주둔하여 홍화진 쪽으로, 양규는 다시 홍화진으로 복귀하여 귀주 쪽으로 양쪽에서 거란을 엄청나게 괴롭힌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거란은 무려 3만 명 이상의 군사를 잃었고, 고려 포로도 3만 명이나 놓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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